오래전 두 사람은 하룻밤을 같이 보냈다. 남자가 던진 자존심에 상처를 입히는 말에 욱해서……. 그러나 그녀는 그와 함께 밤을 보낸 후 깨달았다. 자존심이 상해서가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에게 사랑 받지 못해서, 그 고통을 견딜 수 없어 객기를 부린 것임을.
십여 년의 세월이 지나 두 사람은 쌍방의 합의로 계약결혼아란 것을 했다. 남자는 아픈 아버지를 편안하게 보내드리기 위해, 여자는 오래전 해보지도 못한 사랑을 다시 하기 위해.

그러나 그들의 계약결혼은 순탄하지 못했다. 진짜 사랑은 원하지 않은 순간에, 원하지 않는 얼굴로 나타나곤 한다는 것은 몰랐기 때문이었다.

-본문 중에서-

검은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진 사무실에 그녀의 일정한 숨소리만 들릴 뿐 존재조차 하지 않는 사람처럼 그 자리에 30여분을 그대로 서 있는 그의 눈은 멀리 바깥 풍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한껏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그녀와 달리 늦은 오후, 완연한 가을로 접어 든 햇빛을 온몸으로 받으며 그녀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는 그의 얼굴에는 흑백 사진 속의 인물처럼 무표정하기만 했다.
“저어…….”
“그래서 결정했나? 할 건가?”
천천히 그녀를 향해 돌아서며 너무나 건조한 음성으로 묻는 그의 물음에 그녀는 잠시 엉뚱한 기대로 부풀었던 것들이 무너지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지만 겉으로는 그에 못지않은 무표정한 얼굴로 대답했다.
“예. 하죠. 그 결혼.”
“조건은 그 두 가지 뿐인 것 확실하고? 지금이라도 생각이 바뀌었다면…….”
“아뇨. 그것뿐이에요.”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잘라서 그것뿐이라고 말하는 그녀를 보며 그는 이상하게 몹시 언짢았지만 참았다. 그녀가 제시한 조건이 그에게 해가 될 것이 없다는 사실을 상기했다.
“그래? 그럼 자세한 것은 박 변에게 일임해 두지.”
“박 변이요? 굳이 그렇게까지 할 필요…….”
“있어. 나중에 민 팀장의 생각이 변해서 내 아내로 영원히 눌러 앉겠다고 하면 안 되니까.”
“……알겠습니다.”
“알겠다라……. 좋아. 그럼 이만 나가 봐. 서류는 준비 되는 대로 보내 주지.”
“예.”그는 너무 쉽게, 아니 너무 빨리 자신과의 우습지도 않은 결혼에 동의한 그녀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래도 결혼이었다. 정상적으로 양가 친지들을 모셔놓고 공식적인 결혼식도 올리고 신분관계 등록부상에 흔적을 남기는 지극히 정상적이고 공식적인 결혼. 그럼에도 여자인 그녀가 흔쾌히 응해 준 것이 솔직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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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번. 두 번. 세 번.
그녀의 전화는 그의 전화를 거부했다. 늦은 밤이긴 했지만 그녀가 잠들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불빛에 그는 슬금슬금 끓어오르는 화를 참을 수가 없었다. 그녀가 자신을 피하고 있다는 사실이 참을 수 없었다. 그렇게 사랑한다고 노래를 부르던 그녀가 어느 날 다른 남자 때문에 그와 그의 아버지를 버렸다는 것을 직접 눈으로 확인 순간 미칠 것만 같았지만 참았다. 그녀가 택한 유여원이라는 남자를 죽이고 싶었지만 이성적으로 대처했다. 그녀가 사랑하는 사람이 자신이 아니라면 기꺼이 그녀를 보내 주어야 한다고 그렇게 스스로를 달랬다. 적어도 진짜 사랑을 하는 사람이라면 그 상대를 사랑하는 사람에게 보내 주는 것이라고 믿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가 아는 사랑은 그런 것이었다.
그런데 더 이상은 참을 수가 없었다. 오늘 밤, 그녀가 여원과 같이 있는 그 모습을 본 순간 그는 두 사람 모두를 죽이고 싶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보내 주어야 한다는 것은 이성이 지배할 때나 이해 가능한 말이었다. 근본적으로 사랑은 쟁취하고 보는 것이라는 사실을 잊고 있었던 그는 더 이상 물러서고 싶지 않았다.
그녀를 그 누구에게도 보내고 싶지 않았다. 그녀가 다른 남자의 아내가 되고 그 남자와 행복하게 사는 꼴은 절대로 보고 싶지 않았다. 그의 아이가 아니라면 엄마가 되는 것 또한 용서할 수 없었다. 그녀가 자신이 아닌 그 누구에게도 미소를 짓는 꼴을 볼 수 없었고 그가 아닌 그 어떤 사람의 키스도 받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기 위해서라면 이대로 물러날 수 없었다. 맨 정신으로 불가능하다면 지금 술에 취한 김에. 아니, 술에 취했다는 핑계를 댈 수 있는 지금 그녀를 다시 자신의 곁으로 데려와야 했다. 그러기 위해서 평소라면 절대 하지 않을 행동도 서슴지 않고 할 수 있었다.
“장모님! 접니다. 이 서방입니다. 장모님. 문 좀 열어 주세요. 이 사람이 제 전화를 받지 않네요. 예? 장모님!”
그의 외침에 갑자기 왁자지껄 떠들썩해진 그녀의 집 분위기에 얼른 도망치고 싶었지만 애써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지금 사랑하는 여자를 놓치고 나면 두고두고 후회하게 될 테니까 부끄러워하지 말라고. 유여원 따위에게 절대 그녀를 빼앗길 수 없으니까 이렇게 구질구질하게 매달릴 수밖에 없다고 스스로를 달래며 용기를 내어 보았다. 다른 남자의 여자로 존재하는 민시우를 보느니 차라리 그 자신이 개망나니가 되는 것이 낫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민시우! 듣고 있는 것 알아. 나와 봐. 제발……. 나 도저히 안 되겠어. 내가 당신 없이 살 수가 없어. 그러니까 제발……. 집으로 돌아가자. 날 사랑했었잖아? 아니 사랑하잖아. 다시는 계약 파기 어쩌고 하지 않을게. 응? 아니다, 내가 잘할게. 그러니까 응? 날 좀 봐줘. 사랑해. 민시우……. 제발……. 너 없이 내가 안 되겠다고, 그러니까 나 좀 사랑해주라. 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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