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Book]당신의 계절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잎사귀 지음로망띠끄2013.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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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BN | : 979-11-5760-25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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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하루가 똑같은 사람들에게는, ‘기다리는 것’이 있다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 선배 알아요?”
“먹고 살기 바빠서 그런 생각 못 해봤네, 이 사람아. 자기는 그랬어? 공부할 때야 누구나 다 그렇지. 그 세월 안 겪고 이 자리 있는 사람도 있나.”
“……그때는, 저 사람 나오는 드라마 기다리는 게 일주일 유일한 낙이었어요. 아, 며칠만 더 기다리면 그 드라마 볼 수 있겠구나, 그러면서. 더 웃긴 이야기 해드릴까요? 정말 너무 힘들어서 나쁜 생각 하게 된 날이 있었는데, 그날이 마침 그 드라마 하는 날이었거든요. ‘저 드라마 끝나기 전까지는 못 죽겠다.’ 그렇게 생각하고 버틴 날도 있었어요.”
“재원 씨 은근 변태 같은 구석 있었구나. 기다릴만한 게 그렇게 없었어?”
과거형으로 묻는 희정에게 재원은 과거형으로 답할 수가 없었다. 지금의 자신은 아니라고 할 수 있을까.
일에는 프로, 사랑은 글쎄. 스물일곱 꽃다운 나이에 건어물이라는 썩 명예롭지 않은 타이틀을 공공연히 달고 다니는 여자. 그리고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방황하고 고민하는 21세기 청춘들 중의 하나.
‘넌 사랑하는 사람과 라면을 끓여 먹으며 살래, 사랑하지도 않는 사람과 스테이크를 썰면서 살래?’ 라는 질문에 ‘난 매일 스테이크를 썰게 해 준다면 사랑하지 않던 사람도 사랑할 수 있어.’ 라고 대답하는 매우 현실적인 EQ를 소유하고 있으면서도, 삶에 대한 의미를 끊임없이 찾아가는 내면의 열정을 간직한 그녀.
생각이 너무 많아 자신만의 알 속에 갇혀 있던 그녀의 앞에, 그녀의 알껍데기보다 더 견고한 마음을 가진 피터팬이 나타났다.
“과거를 돌아보는 사람이 있고, 미래를 바라보는 사람이 있잖아요. 우리들 대부분은 후자에 속하겠지만. 또 연세 드신 분들은 전자일 수도 있겠죠. 아무튼, 인생이란 ‘바라보고 있는 그 순간’이라는 뜻이라고, 난 혼자 그렇게 해석해요. 미래도, 과거도 아닌 지금 내가 숨 쉬고 있는 이 순간.”
“…….”
“1분 전의 나로는 돌아갈 수 없죠. 1분 후의 나 자신은 금방 맞이하게 되겠지만, 그건 1분 뒤의 일이고요. 인생은 바로 지금이죠. 재원 씨와 내가 마주보고 있는, 지금.”
일에는 프로. 사랑도 프로 지향. 잘 나가는 한류 스타, 아시아의 별. 나이답지 않게 조숙한 면이 있지만, 그 이면은 어쩔 수 없는 스물일곱 조금은 덜 자란 청춘. 그런 그의 눈에 속을 알 수 없는 반 건조 오징어가 자꾸 밟힌다.
처음에는 어디로 굴러갈지 모르는 콩알 같은 여자. 시간이 지날수록 똑 부러지고 당당하고,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가슴에 구멍을 뚫고 사는 듯 어딘지 모르게 헛헛해 보이는 이 여자에게 자꾸만 마음이 간다.
피터팬을 만난 오징어는 네버랜드에 갈 수 있었을까? 이 계절을 살고 있는 우리 역시, 현실이라는 이름 아래 반쯤 건조된 오징어로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지나치게 현실적이어서 오히려 조금 더 낭만적인, 로맨스의 탈을 쓴 어른을 위한 동화.
<본문 중에서>
“답이 없다, 답이. 결국 뭐라고 해도, ‘그때의 나’가 될 수는 없으니까.”
“…‘그때의 나’라.”
곱씹듯 중얼거리는 재원의 말에 윤화는 길게 담배연기를 내뿜었다.
“있지. 사람들은 쉽게 이야기하잖아. ‘계절은 결국 다시 돌아온다.’고. 가을은 내년에도 올 거고, 단풍도 어김없이 다시 찾아오겠지. 그런데 그거 알아?”
“…뭘요?”
“자기는 지금 스물일곱이잖아?”
“…….”
뜬금없이 나이를 확인하는 윤화를 재원이 말없이 바라보았다. 무슨 이야기가 하고 싶은 걸까.
“가을은 또 오겠지만, 스물일곱 살의 가을은 다시 오지 않는다는 거.”
재원이 놀라 고개를 들었다. 뒤통수를 맞은 기분이다. 그 표정이 재미있는 건지, 아니면 스스로가 말해놓고도 우스운 건지, 윤화의 입가에 씩 하고 짓궂은 미소가 걸렸다. 여느 때와 같은 장난기 가득한 미소인데도 어쩐지 평소와는 조금 다르게 보인다.
“글쎄, 나도 나이를 먹는 탓인가. 아이를 키우는 탓인가. 그것도 아니면 직업 때문인가. 문득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 나에게도 서른일곱의 가을은 이제 다시 찾아오지 않겠지. 스물일곱의 그 가을로 다시 돌아갈 수 없는 것처럼.”
“…….”
윤화가 자리에서 일어서며 엉덩이를 툭툭 털었다. 촬영 시간이 가까워 온 모양이다. 들고 있던 빈 커피 병에 담배꽁초를 집어넣으며, 윤화는 아직 앉아있는 재원을 내려다보았다.
“늘 오는 계절이라고 다 똑같이 생각하지 말라는 뜻이야. 때로는 뒤에 남겨 놓을 수밖에 없는 것들이 있다는 얘기지. 나도 아직 한참 더 살아야 철이 들겠지만. 재원 씨, 스물일곱의 가을은 자기한테도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장난스럽게 한쪽 눈을 찡긋 하고는 안으로 들어가 버리는 윤화를 보던 재원이 결국 고개를 숙이고 피식 웃었다. 그리고는 깊게 심호흡을 해보았다. 어쩐지 눈가가 뜨끈해지는 것 같다. 값싼 자기애가 아니라, 윤화의 말처럼 다시 오지 않을 지금 이 순간의 공기를 폐부 깊숙이 빨아들여 만끽하려는 것이다.
<미리보기>
“있잖아요. 재원 씨가 여태껏 본 드라마 중에서 제일 재미있었던 게 뭐에요?”
“그건 왜요?”
생뚱맞은 그의 말에 재원의 눈에 의아함이 어렸다.
“음, 그럼 드라마 여자 주인공이 남자 주인공에게 했던 대사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건요?”
“…….”
“그 대사, 지금 나한테 해주면 내려줄게요.”
이게 무슨 달밤에 봉창 두드리는 소리인가 싶어서 재원이 황당하다는 얼굴을 했다.
“무슨 부탁이 이렇게 밑도 끝도 없어요?”
“부탁하는 사람 마음이죠. 해 줄 거예요?”
“싫어요. 배우 앞에서 연기를 하라는 거잖아요. 오글거려요. 죽어도 싫어.”
당치도 않다는 듯 싫다고 딱 잘라 말하는 재원의 태도에도 우현은 실망한 기색을 보이기는커녕 오히려 더 뻔뻔한 얼굴을 했다.
“그래요? 그럼 이대로 공관까지 가죠, 뭐.”
그렇게 말하고는 정말로 성큼성큼 걸음을 옮긴다. 그의 팔에 안긴 채로 함께 옮겨지던 재원의 얼굴에 낭패감이 어렸다. 바로 옆에서 그런 그녀의 얼굴이 뻔히 보이는데도, 우현은 네가 이기나 내가 이기나 한 번 해보자, 그런 표정이다. 결국 재원이 항복을 선언했다.
“알았어요. 하면 되잖아요, 하면.”
그제야 우뚝 멈춰서는 우현이 얄미워서 재원은 그의 머리카락이라도 쭉 잡아당기고 싶은 심정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우현은 빙긋 웃으며 기대에 찬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당최 기억에 남는 드라마가 있어야지. 그렇게 속으로 절규하던 재원은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려 보았다. 그리고는 이내 비장한 눈빛으로 우현과 눈을 마주했다.
“…아무거나 해도 되는 거죠?”
“물론.”
“…부셔버릴 거야.”
“…진짜 너무하네.”
허탈한 표정의 그를 보고 있자니 웃음이 나왔다. 그러나 애써 입술을 깨물어 웃음을 참은 재원은 짐짓 퉁명스러운 얼굴로 우현의 어깨를 툭툭 쳤다.
“자, 이제 내려줘요.”
“…….”
시무룩해진 우현이 그야말로 사슴 같은 눈망울로 재원을 올려다보았다. 그 눈빛에 재원은 더 이상 장난을 치지 못하고 그만 픽 하고 웃고 말았다. 예전에도 종종 느꼈던 거지만 그는 눈이 참 좋다. 슬픔 그 이상의 어떤 것을 머금고 있는 느낌. 배우라서 그런 걸까. 그렇다면 그것은 배우로서 타고난 재능인지도 모른다.
“진짜로 해 줄 테니까, 대신 내 얼굴 보지 마요. 진짜 민망하단 말이에요.”
에라, 져 주고 말지. 한 발 물러난 재원의 말에 우현도 그제야 슬며시 웃었다. 양 팔로 자신을 안고 있는 그를 대신해서, 재원이 작은 두 손으로 그의 시야를 가렸다. 눈꺼풀 위로 느껴지는 차가운 손끝의 감촉에 우현의 입가가 부드럽게 휘어졌다. 그러나 정작 그의 얼굴을 내려다보는 재원은 웃고 있질 않았다.
“…사랑이란 게 처음부터 풍덩 빠지는 건 줄로만 알았지, 이렇게 서서히 물들어버릴 수 있는 건 줄은 몰랐어.”
귓가에 다붓하게 감기는 조용한 목소리. 차라리 속삭임에 더 가까운 재원의 음성에 우현의 입가에서 서서히 미소가 걷힌다. 고요함. 눈송이가 나뭇잎 위에 내려앉는 소리가 들릴 정도의 적막만이 그들 사이에 맴돌았다.
재원은 여전히 그의 눈을 가린 손을 떼지 않고 있었다. 감은 눈 사이로, 그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재원은 천천히 고개를 숙여 그의 눈에, 정확하게는 그의 눈을 가린 자신의 손등에 살짝 입을 맞추었다. 입술 끝에 스치는 것은 서늘한 손의 감촉, 그리고 안타까움. 그 안타까움이 재원의 마음이었다. 차마 대놓고, 꺼내놓고 표현하지 못하는.
우현은 무슨 일이 있었는지 눈치 채지 못했다. 손바닥으로 그의 눈꺼풀이 작게 떨리는 것이 느껴졌다. 재원은 자신의 얼굴에서 안타까움을 지워버리고, 다시 짓궂게 웃는 얼굴을 한 다음에야 우현의 눈에서 손을 뗐다. 힘이 빠져 자연스레 스르륵 풀리는 그의 팔에서 땅으로 내려온 재원은 별 것 아니라는 대수롭지 않은 표정으로 한 쪽 눈을 찡긋했다.
“‘미술관 옆 동물원’에 나온 유명한 대사인데, 알아요? 드라마가 아니라 영화지만. 이 정도는 반칙 아니죠?”
“…….”
여전히 말없이 내려다보는 그의 시선에 괜히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다. 혹시 알았을까. 눈치 챘을까. 흐트러지려는 표정을 애써 가다듬으며, 재원이 팔꿈치로 우현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그만 들어가 봐요. 나도 길바닥에서 잠들기 전에 얼른 들어가서 자야겠어요. 잘 자요.”
잘 했어. 어색하지 않았을 거야. 그는 배우지 관심술사가 아닌 걸. 괜찮아. 모를 거야. 그렇게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진정시키며 재원은 우현의 대답도 듣지 않고 휙 하고 등을 돌려 앞으로 걸어갔다. 돌아보지 않을 생각이었다. 등 뒤에서 그의 나직한 음성이 들려오기 전까지는.
“…유명세는 정말 진실한 게 아니에요.”
뽀득. 재원의 걸음이 멈추었다. 그러나 그뿐이다. 그녀의 등은 아직까지는 담담함을 가장하고 있을 터였다.
“잊지 말아요. 난 단지…남자일 뿐이라는 걸.”
멈춰선 재원의 어깨 위로 소복이 눈이 쌓인다. 우현은 그녀의 어깨가 파르르 떨리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한 여자 앞에 서서, 사랑을 구하는.”
기어이 재원의 고개가 돌아갔다. 반쯤 돌아서서 우현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망울이 심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그 시선을 마주하며, 우현은 되레 빙긋 웃었다. 아까 재원이 그랬던 것처럼.
“…영화 ‘노팅힐’에서 줄리아 로버츠가 했던 대사예요. 남자와 여자가 바뀌긴 했지만.”
“…….”
“잘 자요.”
담백하게 말하고 돌아서는 그의 표정이 어떤지는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불빛을 등진 채 걸어가는 그의 뒷모습에서는 망설임의 그림자 따위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 뒷모습이 마치 ‘이제는 더 이상 머뭇대지 않겠다.’는 일종이 선전포고인 것 같아서, 재원은 못 박힌 듯 한참이나 그렇게 제자리에 서 있었다.
“먹고 살기 바빠서 그런 생각 못 해봤네, 이 사람아. 자기는 그랬어? 공부할 때야 누구나 다 그렇지. 그 세월 안 겪고 이 자리 있는 사람도 있나.”
“……그때는, 저 사람 나오는 드라마 기다리는 게 일주일 유일한 낙이었어요. 아, 며칠만 더 기다리면 그 드라마 볼 수 있겠구나, 그러면서. 더 웃긴 이야기 해드릴까요? 정말 너무 힘들어서 나쁜 생각 하게 된 날이 있었는데, 그날이 마침 그 드라마 하는 날이었거든요. ‘저 드라마 끝나기 전까지는 못 죽겠다.’ 그렇게 생각하고 버틴 날도 있었어요.”
“재원 씨 은근 변태 같은 구석 있었구나. 기다릴만한 게 그렇게 없었어?”
과거형으로 묻는 희정에게 재원은 과거형으로 답할 수가 없었다. 지금의 자신은 아니라고 할 수 있을까.
일에는 프로, 사랑은 글쎄. 스물일곱 꽃다운 나이에 건어물이라는 썩 명예롭지 않은 타이틀을 공공연히 달고 다니는 여자. 그리고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방황하고 고민하는 21세기 청춘들 중의 하나.
‘넌 사랑하는 사람과 라면을 끓여 먹으며 살래, 사랑하지도 않는 사람과 스테이크를 썰면서 살래?’ 라는 질문에 ‘난 매일 스테이크를 썰게 해 준다면 사랑하지 않던 사람도 사랑할 수 있어.’ 라고 대답하는 매우 현실적인 EQ를 소유하고 있으면서도, 삶에 대한 의미를 끊임없이 찾아가는 내면의 열정을 간직한 그녀.
생각이 너무 많아 자신만의 알 속에 갇혀 있던 그녀의 앞에, 그녀의 알껍데기보다 더 견고한 마음을 가진 피터팬이 나타났다.
“과거를 돌아보는 사람이 있고, 미래를 바라보는 사람이 있잖아요. 우리들 대부분은 후자에 속하겠지만. 또 연세 드신 분들은 전자일 수도 있겠죠. 아무튼, 인생이란 ‘바라보고 있는 그 순간’이라는 뜻이라고, 난 혼자 그렇게 해석해요. 미래도, 과거도 아닌 지금 내가 숨 쉬고 있는 이 순간.”
“…….”
“1분 전의 나로는 돌아갈 수 없죠. 1분 후의 나 자신은 금방 맞이하게 되겠지만, 그건 1분 뒤의 일이고요. 인생은 바로 지금이죠. 재원 씨와 내가 마주보고 있는, 지금.”
일에는 프로. 사랑도 프로 지향. 잘 나가는 한류 스타, 아시아의 별. 나이답지 않게 조숙한 면이 있지만, 그 이면은 어쩔 수 없는 스물일곱 조금은 덜 자란 청춘. 그런 그의 눈에 속을 알 수 없는 반 건조 오징어가 자꾸 밟힌다.
처음에는 어디로 굴러갈지 모르는 콩알 같은 여자. 시간이 지날수록 똑 부러지고 당당하고,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가슴에 구멍을 뚫고 사는 듯 어딘지 모르게 헛헛해 보이는 이 여자에게 자꾸만 마음이 간다.
피터팬을 만난 오징어는 네버랜드에 갈 수 있었을까? 이 계절을 살고 있는 우리 역시, 현실이라는 이름 아래 반쯤 건조된 오징어로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지나치게 현실적이어서 오히려 조금 더 낭만적인, 로맨스의 탈을 쓴 어른을 위한 동화.
<본문 중에서>
“답이 없다, 답이. 결국 뭐라고 해도, ‘그때의 나’가 될 수는 없으니까.”
“…‘그때의 나’라.”
곱씹듯 중얼거리는 재원의 말에 윤화는 길게 담배연기를 내뿜었다.
“있지. 사람들은 쉽게 이야기하잖아. ‘계절은 결국 다시 돌아온다.’고. 가을은 내년에도 올 거고, 단풍도 어김없이 다시 찾아오겠지. 그런데 그거 알아?”
“…뭘요?”
“자기는 지금 스물일곱이잖아?”
“…….”
뜬금없이 나이를 확인하는 윤화를 재원이 말없이 바라보았다. 무슨 이야기가 하고 싶은 걸까.
“가을은 또 오겠지만, 스물일곱 살의 가을은 다시 오지 않는다는 거.”
재원이 놀라 고개를 들었다. 뒤통수를 맞은 기분이다. 그 표정이 재미있는 건지, 아니면 스스로가 말해놓고도 우스운 건지, 윤화의 입가에 씩 하고 짓궂은 미소가 걸렸다. 여느 때와 같은 장난기 가득한 미소인데도 어쩐지 평소와는 조금 다르게 보인다.
“글쎄, 나도 나이를 먹는 탓인가. 아이를 키우는 탓인가. 그것도 아니면 직업 때문인가. 문득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 나에게도 서른일곱의 가을은 이제 다시 찾아오지 않겠지. 스물일곱의 그 가을로 다시 돌아갈 수 없는 것처럼.”
“…….”
윤화가 자리에서 일어서며 엉덩이를 툭툭 털었다. 촬영 시간이 가까워 온 모양이다. 들고 있던 빈 커피 병에 담배꽁초를 집어넣으며, 윤화는 아직 앉아있는 재원을 내려다보았다.
“늘 오는 계절이라고 다 똑같이 생각하지 말라는 뜻이야. 때로는 뒤에 남겨 놓을 수밖에 없는 것들이 있다는 얘기지. 나도 아직 한참 더 살아야 철이 들겠지만. 재원 씨, 스물일곱의 가을은 자기한테도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장난스럽게 한쪽 눈을 찡긋 하고는 안으로 들어가 버리는 윤화를 보던 재원이 결국 고개를 숙이고 피식 웃었다. 그리고는 깊게 심호흡을 해보았다. 어쩐지 눈가가 뜨끈해지는 것 같다. 값싼 자기애가 아니라, 윤화의 말처럼 다시 오지 않을 지금 이 순간의 공기를 폐부 깊숙이 빨아들여 만끽하려는 것이다.
<미리보기>
“있잖아요. 재원 씨가 여태껏 본 드라마 중에서 제일 재미있었던 게 뭐에요?”
“그건 왜요?”
생뚱맞은 그의 말에 재원의 눈에 의아함이 어렸다.
“음, 그럼 드라마 여자 주인공이 남자 주인공에게 했던 대사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건요?”
“…….”
“그 대사, 지금 나한테 해주면 내려줄게요.”
이게 무슨 달밤에 봉창 두드리는 소리인가 싶어서 재원이 황당하다는 얼굴을 했다.
“무슨 부탁이 이렇게 밑도 끝도 없어요?”
“부탁하는 사람 마음이죠. 해 줄 거예요?”
“싫어요. 배우 앞에서 연기를 하라는 거잖아요. 오글거려요. 죽어도 싫어.”
당치도 않다는 듯 싫다고 딱 잘라 말하는 재원의 태도에도 우현은 실망한 기색을 보이기는커녕 오히려 더 뻔뻔한 얼굴을 했다.
“그래요? 그럼 이대로 공관까지 가죠, 뭐.”
그렇게 말하고는 정말로 성큼성큼 걸음을 옮긴다. 그의 팔에 안긴 채로 함께 옮겨지던 재원의 얼굴에 낭패감이 어렸다. 바로 옆에서 그런 그녀의 얼굴이 뻔히 보이는데도, 우현은 네가 이기나 내가 이기나 한 번 해보자, 그런 표정이다. 결국 재원이 항복을 선언했다.
“알았어요. 하면 되잖아요, 하면.”
그제야 우뚝 멈춰서는 우현이 얄미워서 재원은 그의 머리카락이라도 쭉 잡아당기고 싶은 심정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우현은 빙긋 웃으며 기대에 찬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당최 기억에 남는 드라마가 있어야지. 그렇게 속으로 절규하던 재원은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려 보았다. 그리고는 이내 비장한 눈빛으로 우현과 눈을 마주했다.
“…아무거나 해도 되는 거죠?”
“물론.”
“…부셔버릴 거야.”
“…진짜 너무하네.”
허탈한 표정의 그를 보고 있자니 웃음이 나왔다. 그러나 애써 입술을 깨물어 웃음을 참은 재원은 짐짓 퉁명스러운 얼굴로 우현의 어깨를 툭툭 쳤다.
“자, 이제 내려줘요.”
“…….”
시무룩해진 우현이 그야말로 사슴 같은 눈망울로 재원을 올려다보았다. 그 눈빛에 재원은 더 이상 장난을 치지 못하고 그만 픽 하고 웃고 말았다. 예전에도 종종 느꼈던 거지만 그는 눈이 참 좋다. 슬픔 그 이상의 어떤 것을 머금고 있는 느낌. 배우라서 그런 걸까. 그렇다면 그것은 배우로서 타고난 재능인지도 모른다.
“진짜로 해 줄 테니까, 대신 내 얼굴 보지 마요. 진짜 민망하단 말이에요.”
에라, 져 주고 말지. 한 발 물러난 재원의 말에 우현도 그제야 슬며시 웃었다. 양 팔로 자신을 안고 있는 그를 대신해서, 재원이 작은 두 손으로 그의 시야를 가렸다. 눈꺼풀 위로 느껴지는 차가운 손끝의 감촉에 우현의 입가가 부드럽게 휘어졌다. 그러나 정작 그의 얼굴을 내려다보는 재원은 웃고 있질 않았다.
“…사랑이란 게 처음부터 풍덩 빠지는 건 줄로만 알았지, 이렇게 서서히 물들어버릴 수 있는 건 줄은 몰랐어.”
귓가에 다붓하게 감기는 조용한 목소리. 차라리 속삭임에 더 가까운 재원의 음성에 우현의 입가에서 서서히 미소가 걷힌다. 고요함. 눈송이가 나뭇잎 위에 내려앉는 소리가 들릴 정도의 적막만이 그들 사이에 맴돌았다.
재원은 여전히 그의 눈을 가린 손을 떼지 않고 있었다. 감은 눈 사이로, 그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재원은 천천히 고개를 숙여 그의 눈에, 정확하게는 그의 눈을 가린 자신의 손등에 살짝 입을 맞추었다. 입술 끝에 스치는 것은 서늘한 손의 감촉, 그리고 안타까움. 그 안타까움이 재원의 마음이었다. 차마 대놓고, 꺼내놓고 표현하지 못하는.
우현은 무슨 일이 있었는지 눈치 채지 못했다. 손바닥으로 그의 눈꺼풀이 작게 떨리는 것이 느껴졌다. 재원은 자신의 얼굴에서 안타까움을 지워버리고, 다시 짓궂게 웃는 얼굴을 한 다음에야 우현의 눈에서 손을 뗐다. 힘이 빠져 자연스레 스르륵 풀리는 그의 팔에서 땅으로 내려온 재원은 별 것 아니라는 대수롭지 않은 표정으로 한 쪽 눈을 찡긋했다.
“‘미술관 옆 동물원’에 나온 유명한 대사인데, 알아요? 드라마가 아니라 영화지만. 이 정도는 반칙 아니죠?”
“…….”
여전히 말없이 내려다보는 그의 시선에 괜히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다. 혹시 알았을까. 눈치 챘을까. 흐트러지려는 표정을 애써 가다듬으며, 재원이 팔꿈치로 우현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그만 들어가 봐요. 나도 길바닥에서 잠들기 전에 얼른 들어가서 자야겠어요. 잘 자요.”
잘 했어. 어색하지 않았을 거야. 그는 배우지 관심술사가 아닌 걸. 괜찮아. 모를 거야. 그렇게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진정시키며 재원은 우현의 대답도 듣지 않고 휙 하고 등을 돌려 앞으로 걸어갔다. 돌아보지 않을 생각이었다. 등 뒤에서 그의 나직한 음성이 들려오기 전까지는.
“…유명세는 정말 진실한 게 아니에요.”
뽀득. 재원의 걸음이 멈추었다. 그러나 그뿐이다. 그녀의 등은 아직까지는 담담함을 가장하고 있을 터였다.
“잊지 말아요. 난 단지…남자일 뿐이라는 걸.”
멈춰선 재원의 어깨 위로 소복이 눈이 쌓인다. 우현은 그녀의 어깨가 파르르 떨리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한 여자 앞에 서서, 사랑을 구하는.”
기어이 재원의 고개가 돌아갔다. 반쯤 돌아서서 우현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망울이 심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그 시선을 마주하며, 우현은 되레 빙긋 웃었다. 아까 재원이 그랬던 것처럼.
“…영화 ‘노팅힐’에서 줄리아 로버츠가 했던 대사예요. 남자와 여자가 바뀌긴 했지만.”
“…….”
“잘 자요.”
담백하게 말하고 돌아서는 그의 표정이 어떤지는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불빛을 등진 채 걸어가는 그의 뒷모습에서는 망설임의 그림자 따위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 뒷모습이 마치 ‘이제는 더 이상 머뭇대지 않겠다.’는 일종이 선전포고인 것 같아서, 재원은 못 박힌 듯 한참이나 그렇게 제자리에 서 있었다.
총 7개의 독자서평이 있습니다.





반전도 없고..에필도 많이 부족하고..
로맨스가 좀 부족하지만~잔잔한거 좋아하시는분들한테는
잘 맞을거예요~ sy*** | 2013-06-28






읽으면서 위로도 받고, 생각도 하게 되는 책이네요..
잘 읽었습니다!! as*** | 2013-03-07






윗분 말씀처럼 흔하지 않은 사랑이야기가 너무 좋았어요.
잔잔하면서 여운이 남는 글이네요~ tk*** | 2013-03-06






처음 분위기는 좋았는데, 점점 흐지부지 되는듯한 느낌이 살짝 들었습니다.
에필이 좀 부족한것 같아 아쉽네요. si*** | 2013-0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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