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랑새를 찾아요’

잔인한 시간의 위험 속에서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오히려 온 세상에 자신을 드러내고 사는 남자. 지나친 관심과 호기심이 그에게는 최상의 보호막이자 방패가 되어 주었으나 실상 진실은 지독한 불신과 외로움에 가라앉은 고독뿐이다.
우연한 충동으로 나선 길에서 뜻밖의 인연을 만나게 되지만 그 역시 또 다른 어두운 자화상임을 알아 본 그의 마음도 편치만은 않다. 모른 척 하기도 그냥 뿌리치기도 쉽지 않다. 상대의 본질을 모르는 그의 고민은 깊어만 가는데…….

원래 세상은 어둡고 추운 곳이라 생각했다. 따라서 딱히 긍정적인 기대나 희망은 버린 지 오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정없이 몰아치기만 하는 매정한 인연들에는 넌덜머리가 난다. 그녀의 힘들고 지친 발걸음은 더욱 어두운 곳으로 뒷걸음질인데 문득 손을 내미는 낯선 호의가 미심쩍기만 하다. 사람의 진심을 어떻게 받아야 하는 지, 그 고마움은 무엇으로 보답해야 할지도 잘 모르는 한 여자의 서툴고 미숙한 감정은 혼란스럽기만 하다.

오만하고 외로운 남자와 무심하고 쓸쓸한 여자의 사랑 이야기.

-본문 중에서-

아무런 확신도 없이 문손잡이를 잡았다. 찰칵, 기적같이 문이 열렸다. 앞뒤 살필 여유도 없이 일단 그는 집 안으로 들어갔다. 그곳은 딴 세상이었다. 흡사 비바람이 휘몰아치는 들판에서 간신히 발견한 안락한 오두막 안으로 막 들어선 느낌이랄까. 태평한 집 안의 풍경은 불과 1초 전에 겪었던 다급함을 눈 녹듯 사라지게 만들었다.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지금 막 세수를 마치고 나온듯한 희멀건 남자아이가 수건을 들고 멍하니 자신을 바라보는 얼굴이었다. 젖은 앞머리가 여기저기 삐죽 솟은 모양이 우스꽝스러웠다. 생긴 것과는 다르게 목소리는 꽤 침착했다.
“누구세요?”
“나?”
“그래, 당신.”
어느새 남자아이는 잔뜩 경계하는 눈빛이었다. 민석은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어린 녀석이 다짜고짜 반말이라니. 그 만만치 않은 기세에 자기도 모르게 살짝 턱에 힘이 들어갔다.
“어머니 안 계시나?”
“어머니는 왜?”
민석은 문짝 쪽으로 고개를 젖히면서 다시 남자아이를 쳐다보았다.
“월세 삼십. 사람 구하는 거 아닌가?”
그러자 남자아이는 더욱 굳은 얼굴로 노려보는 것이었다.
“룸메이트는 내가 구해. 그런데 당신, 남자잖아.”
민석은 대답을 듣자마자 쓴웃음을 지었다. 이 자식 동거할 여자라도 구하는 거였나? 뭔가 따끔한 말을 뱉으려는 순간 집 아래쪽 골목에서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필시 그를 찾으려는 기자들의 소리임이 분명했다. 민석은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같이 살 여자는 좀 더 나중에 구해도 늦지 않을 텐데.”
그러자 마주 보고 있던 남자아이의 얼굴색이 확 변했다. 자식, 이 정도도 소화 못할 주제에 여자를 찾아?
가소로운 마음에 한쪽 입꼬리가 올라가고 말았다.

명신은 하루 종일 무거운 마음으로 고민을 하고 있었다. 입맛이 없어 저녁도 굶고 찬물로 세수를 하고 나온 참이었다. 잠긴 줄 알았던 문이 느닷없이 벌컥 열리고 웬 시커먼 남자가 뛰어 들어왔다. 터져 나오는 비명을 겨우 억누르고 말을 건네자 어이없게도 방을 구하러 온 사람이라니. 게다가 자신을 남자로 보고 꽤나 유치하다는 듯 아니꼬운 눈초리까지 짓는 것이 아닌가.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그녀는 잠시 고민을 했다. 그래, 말 많고 참견하기 좋아하는 떠버리 여자보다 더 나을지도 모르지. 맘을 단단히 먹고 온몸에 힘을 주었다.
“내 여자 구하는 문제는 그쪽이 상관할 바 아니고. 그럼 언제부터 들어올 건데?”
민석은 무표정하게 가슴팍에 있는 지갑을 꺼냈다.
“오늘, 지금 바로.”
놀랍게도 눈앞에 100만 원짜리 수표가 팔랑거리고 있었다.
“뭐 문제 있나?”
“아니, 근데 거슬러 줄 돈이 없어.”
남자는 성급하게도 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신발을 벗고 있었다.
“그럼 3개월 치 선불로 하지. 계약서나 써 와.”

[미리보기]


한국대학교 사학과 대학원생. 알면 알수록 신기한 녀석이었다. 가끔씩 무게감 있는 말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툭툭 던지는 폼이 까막눈은 아니구나 했지만 이 정도일 거라고는 생각 못했다. 민석이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하자 명신은 영 떨떠름한 모양이었다.
“한국대학교 학생이라면 모두가 반짝반짝 빛날 거라는 편견을 버려. 원래 어딜 가나 후줄근한 구성원이 꼭 있는 법이야.”
싱거운 녀석. 넌 결코 후줄근하지 않아. 하지만 설익은 칭찬을 성급히 내뱉고 싶지 않았다.
“내 편견을 깨 줘서 고맙군. 공부는 계속할 건가?”
명신의 얼굴에 옅은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그럴 수 있으면……. 난 그럼 들어갈게.”
“잠깐만. 할 말 있어.”
명신이 일어서려다 말고 다시 앉았지만 민석은 조금 망설였다. 사물의 비주얼을 보는 안목이라면 방송국 피디나 광고 기획사 사람들을 따라갈 자가 없는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민석이 명신을 데리고 현장에 나가면서 그 주변 사람들의 눈에 명신이 들어온 모양이었다. 불과 한 달여 노출되었을 뿐인데 꽤 비중 있는 기획사와 광고팀에서 지찬을 통해 흥미 있는 제의를 해왔다.
“학교 등록금 한 번에 벌 수 있는 기회가 생겼어.”
“무슨 말인데?”
“너 그렇게 후줄근하지 않은가 봐. 돈 줄 테니 사진 좀 찍자는 사람들이 있어.”
명신은 깜짝 놀랐다. 흔히들 말하는 스카우트 같은 건가? 정말? 나에게?
“구체적으로 말해 줘.”
“어떤 시답잖은 기획사에서 이쪽 일 한 번 해보지 않겠냐는 제안 하나, 다른 하나는 내가 하는 화장품 브랜드 지면 광고에 너하고 투 숏으로 같이 사진 작업을 하고 싶다는 제의.”
가슴이 뛰었다. 기대감이 몰려온 동시에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본격적으로 무슨 일을 하게 되면 더 이상 남자인 척 속임수는 쓸 수 없다는 우려와 체념이 한꺼번에 몰려왔다. 암울한 바닥을 벗어나려고 한 거짓말이 이렇게도 빨리 답답한 올가미가 될 줄은 몰랐는데. 작은 한숨이 나왔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 좋은 기회를 놓고서도 지금 바로 앞에 있는 남자를 기만한 기막힌 현실을 유지하는 게 우선이라는 경각심이 들었다. 그리고 익숙지 않은 그 어떤 일에 섣불리 뛰어들고 싶은 욕구도 생기지 않았다. 어차피 여름이 지나면 학교로 돌아갈 돈은 넉넉히 마련될 것이므로. 결심은 빠를수록 좋다.
“싫어. 난 그런 거 못해.”
“좀 더 생각해 보지 그래? 해 본 적도 없잖아.”
“형 보니까, 이 일 장난 아닌 거 같아. 나는 이렇게 사는 거 싫어.”
“이렇게 사는 게 어떤 건데?”
어느새 민석은 냉장고에서 가져온 맥주를 명신의 잔에 따르고 있었다.
“장 그르니에가 쓴 ‘섬’이라는 산문집이 있는데, 내가 특히 좋아하는 ‘케르겔렌 군도’라는 글을 보면 그런 게 나와.
데카르트의 비밀스러운 생활에 대한 이야기인데, 그는 각자 자기 일에 골몰하는 복잡한 도시인들에 섞여서 대도시가 갖추고 있는 편리함을 골고루 누렸대. 근데도 사막 한가운데서 사는 것 못지않게 고독하고 호젓한 생활을 할 수 있었다는 거야. 흔히들 한적한 시골에서 살아야 평화로울 거라 생각하지만 조용한 시골 사람들의 호기심은 상상을 초월하는 거거든. 아무튼 데카르트는 생활을 완전히 개방해 놓음으로써 정신을 자기만의 것으로 간직할 수 있었다는 이야기.
형은 데카르트 같아.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다 보여주면서 사실은 혼자만의 섬에서 살아. 고독하고 호젓하게. 근데 난 외롭게 살기 싫거든.”
맥주를 한 모금 마시고 묻은 하얀 거품을 혀로 핥는 명신은 천연덕스러웠다.

모든 것을 공개한 비밀 생활.
온 국민의 시선을 방패 삼아 계모의 위협에서 벗어나려 했던……. 민석은 놀라움을 감출 수가 없었다. 지찬을 제외하면 자신의 존재 방식을 이렇게 적나라하게 꿰뚫어 볼 사람은 아무도 없을 거라 믿었다. 그것이 비록 생존을 위한 처절한 방편이라 할지라도 자신이 또 다른 섬이라는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었다. 그가 명신을 ‘섬’이라고 느낀 것처럼 명신 또한 그를 ‘섬’으로 보고 있다는 사실이 특별하게 다가왔다. 흡사 사춘기 시절 이웃집 누나에게 한눈에 반했던 것처럼.
한순간 따뜻한 열기가 그의 온몸을 휘감았다.
같은 종족은 서로를 알아보는 법.
다시 안타까움이 밀려왔다.

‘네 녀석이 여자였다면, 어쩌면 사랑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결국 우리는 각각 외롭게 떠 있는 섬일 뿐이야.’
민석은 창백한 얼굴로 차가운 유리잔을 으스러지도록 움켜쥐었다.

명신은 조금 전부터 안색이 달라진 민석을 보고 있었다. 맥주 한 잔에 취했을 리는 없다.
역시 많이 피곤한가? 드라마 속에서나 천의 얼굴일 뿐, 일상에서는 지극히 담담한 그가 오늘은 무척 노골적이었다. 놀라움, 경이로움 혹은 안타까움? 조금 힘겨워 보이는 그에게 가벼운 위로를 하고 싶어졌다.
“못하겠다고 해서 기분 나쁜 건 아니지? 미안해.”
“쉬어.”
민석은 갑자기 일어나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나의 즐거운 상상이 사람들에게 해피 바이러스가 되어 널리 퍼지기를 원하는 엉뚱 평범한 사람. 팍팍한 세상이지만 그래도 가장 큰 낙은 사랑뿐이라고 믿는 소심한 낙천주의자.
로망띠끄에서 활동 중

[출간작]

<메리독구 동물병원> 환상미디어 10월 28일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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