즐거움과 짜릿함을 위해 시작한 연애에서 상처 따위 절대 받지 말자. 삶은 씁쓸하지만 연애만큼은 반드시 즐거워야 한다!

연애의 고수인 어머니와 동생 사이에서 치일대로 치인 후, 서른이 되기 전에 꼭 제대로 된 연애를 해보기로 결심한 김시정. 그녀가 생각하는 연애는 모름지기 즐겁고 행복해야 하는 법이었다. 그 생각은 우연히 만난 진휘와 연애를 시작한 후에도 변함없었다. 하지만 그가 은성 그룹의 후계자라는 사실은 미처 알지 못했고, 게다가 주변의 질시와 오해는 점점 더 커져가는데……. 연애란 게 이렇게 어려운 것이었나요!

“착한 일을 했으니까 선물을 줘야겠죠?”
“무, 슨…….”
채 말을 맺을 겨를도 없이 그의 얼굴이 더욱 가까이 다가오고 있는 것을 보고 시정은 그대로 숨을 멈추고 눈을 감아버렸다.
꼭 다물려 있는 입술에 다가오는 매끄럽고 촉촉한 느낌에 시정은 무릎 위에 놓인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리고 발견한 확실한 사실 하나.
이 남자 입맞춤에 있어서는 절대적인 고수다.



작가 소개

한승희

열심히 읽고 부지런히 쓰기를 소원.
올해 안에 ‘산해경(山海經)’ 완독이 목표.
얼마 전 새로 사귄 장이와 함께 느린 걸음 걷는 중.


출간작

청혼의 순서
절대적인 몇 가지
사랑을 누리다
데이드림
매듭



미리 보기

“진심이에요?”
숍 앞에 차를 세운 후 그녀를 돌아보며 진휘가 다시 한 번 물었다. 식사를 마치고 나와 여기까지 오는 동안 벌써 열 번도 넘게 들은 물음이다. 하지만 시정의 대답은 변하지 않았다.
“네.”
미간에 두어 줄 주름이 서는 걸 보니 곧장 숍으로 돌아가겠다는 말이 마음에 들지 않은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지금은 혼자 있어야 했다. 충동적으로 내린 결정이 과연 잘한 짓인지 침대 속으로 뛰어 들어가 이불을 뒤집어쓰고 곰곰이 생각을 해 볼 시간이 된 것이다. 어쩌면 고등학교를 졸업하면서 작별을 고한 손톱을 깨무는 고약한 버릇이 슬그머니 다시 나올지도 모를 일이지만 지금으로서는 생각을 다잡을 시간이 필요하다.
“좋아요. 하지만 오늘만이라고 약속해요.”
눈앞으로 새끼손가락 하나가 다가들었다.
“이렇게 나 혼자 팽개쳐 놓고 가는 거 오늘이 마지막일 거라고 약속.”
‘어서.’라고 재촉하며 자신의 것으로 시정의 새끼손가락을 감았다. 마주 감긴 손가락의 단단한 느낌에 시정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손가락 끝에 힘을 주었다.
“착하네.”
머리라도 쓰다듬으려는 듯 올라오는 손을 고개를 돌려 스윽 피하자 뺨에 그의 손바닥이 닿았다. 본의 아니게 그의 손 안에 얼굴을 밀어 넣은 셈이 되고 말았다. 얼굴을 붉히면서도 볼에 닿은 매끄러운 감촉에 잠깐 황홀해하고 있는데 잠깐 사이에 단단한 손에 얼굴이 들리고 어느새 그의 눈이 채 5센티미터도 되지 않을 만큼 가까이 다가와 있었다. 어머나.
“착한 일을 했으니까 선물을 줘야겠죠?”
“무, 슨…….”
채 말을 맺을 겨를도 없이 그의 얼굴이 더욱 가까이 다가오고 있는 것을 보고 시정은 그대로 숨을 멈추고 눈을 감아버렸다. 그리고 곧 맛있는 음식을 베어 무는 듯 살짝 벌어진 그의 입술이 자신의 것을 감싸 안는 것이 느껴졌다.
꼭 다물려 있는 입술에 다가오는 매끄럽고 촉촉한 느낌에 시정은 무릎 위에 놓인 주먹을 불끈 쥐었다. 꽉 다물어진 주먹은 한참동안 펴질 줄을 몰랐다. 그리고 발견한 확실한 사실 하나.
이 남자 입맞춤에 있어서는 절대적인 고수다. 비록 비교 내지는 대조해 볼 경험이 창피해서 차마 꺼내 놓고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빈약하지만. 어쨌든 개점 이래 가장 수입이 좋았던 지난 달 숍의 전체 매출액을 걸고 장담하건데, 모르긴 몰라도 이 방면에서는 이미 선수를 넘어선 고수임이 분명했다.
“무슨 향수 써요?”
아주 기이인, 김시정의 인생사에 아주 바람직한 방향으로 길이 남을 긴 키스를 마치고 그가 처음 물은 말이었다.
“아무것도.”
마음으로야 ‘따로 쓰는 건 없는데. 왜요? 좋은 향기라도 나요?’ 라며 애교라도 떨고 싶었지만 지금의 컨디션으로는 그렇게 긴 대사가 도저히 나와 줄 것 같지는 않았다. 자칫 긴 말을 꺼냈다가는 흥분 때문에 할딱이는 낮은 숨소리만 내고 말 것이다.
“처음에 봤을 때도 그렇고 지금도. 당신한테서는 항상 좋은 향이 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인간이 후각에 어느 정도 의존하며 살고 있는지 알지 못한다. 사고와 기억을 비롯한 여러 가지 부분에 고루 영향을 미치는 후각의 기능에 대해 제대로 알게 된다면 놀라 그 자리에서 까무러칠지도 모른다. 그러니 당연히 좋은 향내가 난다는 말에 기분이 좋아질 수밖에.
“갈게요.”
미소를 참는 모습을 보이지 않기 위해 시정은 고개를 돌리고는 차문을 열었다.
“잠깐만.”
기어이 차에서 내려 배웅을 하는 그를 보자 잠시 진정되었던 심장은 다시금 토닥거렸다. 태양 아래 서 있는 그의 모습은 지금까지 봤던 어떤 남자보다 화려하고 빛이 났다.
“여기 주정차 금지구역이에요.”
조금 전까지 입술을 맞대고 숨결을 주고받던 남자에게 하기엔 어울리지 않은 말이었다. 그렇지만 연이은 촉각과 시각의 충격에 거품기로 잔뜩 휘저은 달걀흰자처럼 엉망이 된 머리로는 도저히 다른 말을 떠올릴 수가 없었다.
“전화할게요.”
목소리에 담긴 미소를 얼굴에서도 확인하기 위해 눈을 드는데 낯익은 따스함이 입가에 잠깐 닿았다 멀어졌다.
“그냥 보내자니 허전해서.”
장난꾸러기처럼 웃으며 엄지로 입술 가를 한 번 쓸어주고는 그는 다시 자동차로 돌아갔다. 붉은빛으로 멀어지는 미등을 보며 시정은 자신의 입술을 핥았다.
별 느낌이 없었다. 조금 전 그의 것이 와 닿았을 때 느꼈던 설렘이나 두근거림은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그럼 역시 상대에 따라 달라지는 건가.
저절로 올라가려는 입 꼬리를 끌어내리며 옮기는 발걸음을 낯익은 목소리가 붙잡았다.
“어이 김 부장.”
“어, 엄마.”
서둘러 돌아서며 시정은 마지막으로 그의 차가 사라진 쪽으로 향해 짧게 눈길을 주었다. 가느다랗게 뜬 김미옥 여사의 두 눈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이거 심상치 않겠는 걸. 이름 대신 김 부장이라고 부른 것부터가 긴히 할 말이 있다는 증거였다.
“누구니?”
빙 돌리거나 에둘러 말하는 법 없이 곧장 핵심을 찌르는 것이 역시 김미옥 여사다웠다. 지윤의 입을 미리 막아뒀어야 하는 건데. 원래 로맨틱한 거라면 물불 못 가리는 그녀이고 보면 멋진 남자가 손목을 잡고 나가는 걸 보고 당연히 영화 속 장면 같다며 팔짝팔짝 뛰었을 테고 그 즉시 수화기를 들어 김미옥 여사에게 보고를 했을 거라는 생각이 왜 이제야 드는 걸까.
이런 이런. 한 발 늦게 상황 파악을 끝낸 시정이 고개를 저었다.
그래도 일단은 한 걸음 물러나 발뺌을 하는 게 최선이다.
“누가?”
누굴 묻는지 모르지 않지만 지금처럼 김미옥 여사가 지나친 호기심을 보일 때에는 철저하게 아무것도 모르는 척 순진한 얼굴을 보이는 것이 최선이었다. 눈치 빠른 김미옥 여사의 딸로 평생을 살다 보면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절로 터득하게 되는 노하우였다.
“딴청 피우지 말고 얼른 말해. 대체 누구야?”
“아무도 아니야.”
설마 손목 붙들고 나갔다는 말까지는 안 했기를 바라면서 시정은 종종걸음으로 재빠르게 옆을 지나쳤다. 숍 안으로 들어가자 저쪽에서 손님을 상대하고 있던 지윤이 고개를 들었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들어와 나란히 선 모녀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고 알겠다는 미소를 띠는 그녀에게 눈을 치뜨는 것으로 시정은 이후에 있을 응징에 대한 경고를 날렸다. 복수를 다짐하는 시정의 살벌한 눈빛에 지윤이 어깨를 부르르 떨며 재빨리 손님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숍에 들어오자마자 너부터 찾았다면서. 같이 나갈 때도 손목 꼭 붙들고 멋있게 퇴장했다던데, 어디서 뭐하는 누구야?”
계속해서 반복되는 누구냐는 물음에 시정은 그만 손을 들고 말았다. 이쯤 되면 사실대로 털어놓는 것이 상책. 시간을 끌어봤자 들볶임만 더해질 것이다.
“백화점에 강의 갔다가 알게 된 사람이야. 어머니 생일이라고 선물 보러 왔다가 마침 같이 밥 먹자고 해서 나간 거고.”
자고로 제대로 된 거짓말에는 언제나 적당히 진실이 섞여 있는 법이다. 아무 생각 없이 멋모르고 거짓말만 풀어놓다가는 자칫 거짓말의 미로에 빠지기 쉽다. 애초에 있지도 않은 것들을 만들어내려니 머릿속이 얼마나 바쁘겠는가 말이다. 차라리 그냥 있는 그대로의 사실들 중에서 몇 가지를 적당히 추려내고 조합해서 목적에 맞게 다듬는 것이 무릇 참된 거짓말쟁이의 자세인 것이다.
“다른 용건 하나 없이 순전히 선물만 사러 온 녀석이 같이 밥 먹자면서 손 붙들고 나갔다고?”
나름대로 최소한의 사실들을 조합해서 최대한 정직하게 말을 했건만 돌아오는 건 코웃음이었다.
“얘가 나를 완전 숙맥으로 아네. 얘, 내가 아는 사람 중에서 순진한 애를 꼽으면 첫 번째가 너야. 그런데 네가 지금 나를 속이려고 그러니?”
가소롭다는 듯 코웃음을 치는 김미옥 여사의 말을 듣고 시정은 아차, 싶었다. 지난 밤 무슨 꿈을 꿨는지 모르지만 걸려도 단단히 걸린 것이다. 방금 전까지 참된 거짓말쟁이 어쩌고 하며 잔뜩 의기양양해 있던 거 모조리 취소. 오늘따라 김미옥 여사의 감지 촉수는 500퍼센트 이상 발휘되고 있었다.
“엄마도 참.”
김미옥 여사를 도와 본격적으로 숍을 운영하고 사람들을 접하면서 세상사에 닳고 닳았다는 생각에 가끔 씁쓸할 때가 있었다. 하지만 역시 김미옥 여사에 비한다면 새 발의 피, 동해 바다 위를 떠도는 가랑잎이나 다름없었던 것이다.
“엄마 말처럼 내가 그렇게 마냥 순진하기만 하면 숍을 어떻게 운영해. 물론 엄마가 많이 도와주긴 하지만 어쨌든 나도 날마다 사람들을 상대하잖아. 그런데…….”
은근슬쩍 넘어가려는 말은 더 들으려 하지 않고 김미옥 여사는 손사래부터 저었다.
“시끄러, 시끄러. 이유 막론하고 처녀는 무조건 순진한 거야. 너 아직 남자 모르잖아. 그럼 순진한 거지 뭘.”
붉은 기운이 삽시간에 시정의 온 얼굴을 뒤덮었다. 이게 엄마가 딸한테 해도 되는 말인지. 당장 나가서 길을 막고 물어보고 싶지만 그래봤자 집안 망신에 쪽 팔리는 건 덤일 테니 꾹 참는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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