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작품 소개

“좋아해. 널, 연모하고 있어.”

“죄송합니다만, 소저. 듣지 못한 걸로 하겠습니다.”

율은 지금까지 희아와 닿아 있던 것만으로도 너무나 기적 같아 더 바라는 건 사치라고 생각했다. 그걸 알면서도 바라게 된다.

하나, 제 과거가 그녀마저 잡아끌어 어둠에다 처박아버릴까 봐 두려웠다. 자꾸만 밀어내고 모르는 척했다.

연모하고 있지만 자꾸만 어긋나는 시선들. 율과 희아가 서로를 마주 보는 날은 올 수 있을지. 그의 가슴속에 부는 바람은 언제쯤 그칠지.

“당신을 만났기에, 저는 다시 살아가고 싶어졌습니다.”

진실을 말해야 했다. 그녀를 위한다는 위선으로 거짓을 읊어, 그녀를 슬프게 해선 안 되었다.

“희아.”

율이 부드럽고 애달프게 그녀를 불렀다.

“연모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처음 만났었던 그 순간부터 지금까지 계속.”

2. 작가 소개

한하연

쓰는 일이 좋아서 시작했다가 지금도 쓰고 있는 평범한 글쓴이.

동화와 귀여운 걸 좋아하지만 지극히 현실적인 면도 있는 그런 사람.

▣ 출간작

그녀는 수학을 배운다(ebook)

엘핀느의 꽃(ebook)

붉은 벨벳 위 하얀 진주 한 알(ebook)

달콤한 말 세 방울(ebook)

푸른 단검과 흰 장미(ebook)

하우스(ebook)

맑은 하늘 푸른 잎새(ebook)

목련화(ebook)

루비아스 마티아스(ebook)

그해 여름, 우리는 이혼했다(ebook)

로맨스는 없다(ebook)

스트로베리 키스

밤은 두 개의 이름을 가지고 있다

비밀의 숲(공저)

3. 차례

#서장序章

#1장. 흑화黑花

#2장. 깨달음은 어느 순간에

#3장. 백화白花

#4장. 가짜와 진짜

4. 미리 보기

“이거 우리 집에도 필사본 하나 있어. 초기본이라 원본 삽화가가 그림을 그렸다던데, 율은 못 봤었나? 원본은 희귀하다 들었는데 어디서 났어?”

“태자께서 주셨습니다.”

“뭐? 태자 저하가?”

희아는 대번에 못마땅한 얼굴이 되었다.

“사람을 위험에 빠뜨렸으면서 뻔뻔히 다시 얼굴을 내밀었단 말이지…….”

율이 황급히 손을 내저었다.

“좋은 분 같았습니다. 저에 대해 오해한 부분이 있으셨다며, 도박장 일을 사과하시고, 선물도 주셨습니다.”

“원하던 책을 선물 받아서 마음이 유해진 건 아니고? 달랑 책 하나 던져주고 생명이 왔다 갔다 하게 만든 걸 용서해라, 했단 말이지?”

희아의 예리한 눈빛에 율은 고개를 가볍게 저었다. 물론, 선물이 마음에 든 건 사실이다. 그렇다고 해서 사과를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데 억지로 고개를 끄덕인 것도 아니다.

희아가 불만스럽게 투덜거렸다.

“도대체, 무슨 오해를 했기에 사람을 곤란하게 만들어? 천만다행으로 잘 마무리됐기에 망정이지, 큰일을 당할 수도 있었단 말이야. 한 나라의 황제가 될 사람이니 좀 더 책임감과 의무감을 지니고 있어야지.”

“하하. 단단히 미운털이 박히셨군요.”

율이 조금 씁쓸한 얼굴로 덧붙였다.

“그래도 그러지 마십시오. 소저의 부군이 될지도 모르는 분 아닙니까.”

부군. 희아 소저의 남편.

과거를 묻고 다례국으로 넘어온 순간부터, 어느 누군가과도 깊이 관계 맺지 않겠다 다짐했었다. 그러기에 주변인으로서 존재하는 것을 당연하다 생각했고, 거기서 벗어나지 않으려 노력했다.

그런데 언제부터였을까. 10년 동안 한결같이 절 찾아오던 소녀는 여인으로 성장했고, 그 또한 어른이 되었다. 맞다고 여겨 행해왔던 것들이 조금씩 틀어지기 시작한다.

부군. 희아 소저의 남편.

제가 말해놓고 제가 상처받다니, 이 얼마나 어리석은지.

털썩, 희아가 율의 옆에 앉더니 딱 부러지게 답했다.

“내 이름이 태자비 후보로 거론되고 있는 건 사실이야. 하지만 확정된 건 아니지. 내 남편이 누가 될진 아무도 모른다고.”

“그렇지만, 이왕이면 좋은 분이 좋겠지요.”

“당연하지. 성미가 더러운 사내는 이쪽에서 사절이라고. 태자비 후보에 오르는 것까지야 거부할 순 없겠지만, 아무리 정략결혼이라 해도 서로 믿고 평생을 함께할 수 있는 이이길 바라는 게 당연하잖아?”

언제나 제 뜻을 확실히 주장하는 게, 사랑을 가득 받고 자란 티가 역력하다. 저리 똑 부러지게 말하면 예의 없단 느낌이 들 수도 있는데, 그저 솔직하고 밝아 보일 뿐 나쁜 인상을 주지 않는다. 격식을 차려야 할 땐 깍듯하게 차리고, 다른 사람을 배려해야 할 땐 극진히 배려하는 사람이라 그런지도 모른다.

희아는 기본적으로 사람에 대한 믿음과 애정을 가지고 있다. 그녀의 밝은 면 덕분에 지난 10년간 그는 좀 더 나은 사람이 되었다 생각한다.

매사에 분명한 희아가 그에게 실망해, 저에 대한 관심을 거둬주길 바라 율은 어설프고 물렁하게 굴어왔다. 희아가 싫어서가 아닌, 오히려 희아에 대한 애정 때문에 그리했던 것이다.

아현국에서 머나먼 이곳까지 온 것은, 그리고 아현국만큼이나 땅덩이가 넓디넓은 다례국까지 온 것은 과거를 끊어내기 위해서이다. 그러나 만에 하나, 는 있는 법. 희아가 제게 친밀감을 느끼거나 인간적인 애정을 갖지 않았으면, 하고 바랐다.

그러나 희아는 언제나 밝게 웃으며 그에게 다가왔고, 그에게 손 내밀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아무리 바보 같은 모습을 보여도 더 도와주려 할 뿐, 그를 멀리하지 않았다.

그 안온함에 취하고, 따뜻한 사람들에 젖어들어 이대로 여기에 안주해도 되지 않을까 생각하게 됐을 즈음, 그의 착각을 깨우듯 전혀 예상 못 했던 곳에서 그의 과거가 된 자들이 불쑥불쑥 나타났다.

예전엔 혹시라도 그런 일이 생긴다면, 주저 없이 떠나버리리라 생각했다. 바람이 한곳에 머물러 있지 못하듯, 그 역시 한데 고여 있지 못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렇게까지 미련이 생겨버릴 줄이야.

흑화가 한 가지는 확실히 맞혔다. 자신은 희아란 존재에 익숙해져 그녀가 없는 삶은 상상하기조차 힘들다. 희아가 불쑥 떡집에 나타나 율에게 충고하고, 제발 단호하게 굴어라 율을 다그치는 일이 없어진다면 허전하지 않을까.

“소저의 말이 맞습니다.”

율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했다. 그러자 희아가 불쑥 물었다.

“율은 어떤 사람하고 백년해로하고 싶어?”

누군가와 함께하는 삶. 율은 인생의 여정을 함께 걸어갈 다정한 존재가 싫은 것도, 그런 존재를 바라지 않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저는 이렇게 쭉 홀로 사는 게 목표라서요.”

그게 최선이라고 생각한다. 희아는 그를 이해하지 못했다.

“살아온 날보다 살아갈 날이 더 긴데, 벌써부터 독신을 목표로 할 필요는 없잖아? 정말 혼자이고 싶은 거면 또 모르지만, 율은 사람을 꽤 좋아하는 것 같은데 말이지.”

10년 세월을 허투루 보낸 건 아니었던 듯, 희아는 율의 속마음을 단박에 맞혔다. 희아가 율의 등을 토닥이며 말했다.

“목표가 있는 건 좋지만, 혼자 있는 삶이든 함께하는 삶이든 율이 원하는 대로 되면 좋겠어.”

이럴 때는 제법 어른스러워, 위로를 받는다. 그에 대한 염려에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쏟아놓지만, 결국에 가서는 그의 뜻을 존중해준다. 희아는 그런 사람이다. 그렇게 따스한 사람이기에, 그는 그녀의 온기에 빠져버렸다.

“……되셔야 합니다.”

이제는 거의 잊어버린 목소리의 그녀. 말투는 부드럽고 필요한 말만 했지만, 그녀가 하는 모든 말에는 그에 대한 압박이 서려 있었다.

그가 제 뜻대로 되지 못한다면 무가치하다는 것처럼 굴었다. 그래서 그녀가 세상을 뜨기 전까지, 율은 그녀가 바라는 바를 이뤄주기 위해 살았다. 아마 그녀가 일찍 유명을 달리하지 않았다면, 제가 그토록 원해왔던 것이 이뤄지는 모습을 목도했을 것이다.

율이 만약 그 자리에 올랐다면, 쉽사리 벗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그는 책임감이 강해, 한번 맡은 건 내팽개치지 못한다. 그러나 그녀는 너무나도 허망하게 스러져버렸고, 그녀가 사라지고 나자 그는 깨달았다. 여태껏 그가 애써왔던 것은 본인이 바란 바가 아닌, 그녀의 목표였을 뿐임을.

남편이 갑자기 세상을 뜨자, 남편의 자리를 제 아들이 이어받아야만, 아현국에 뿌리가 없는 제가 자신의 위치를 공고히 할 수 있다고 그녀는 믿었다. 그것이 저와 아들의 행복이라고 믿었다.

지금 와 돌이켜보면, 그녀가 원했던 건 부도 명예도 권력도 아니었던 것 같다. 그녀가 스스로의 눈을 가리고서 스스로의 마음을 속이고 있었던 이유를, 10년이 지난 지금은 어렴풋이나마 알 것 같았다. 그녀가 바랐던 건, 그가 이뤄줄 수 있는 게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는 그녀의 장례 후 소리 없이 사라졌다. 허망함과 상실감을 지울 수 없어서.

첫눈에 반해버린 사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지도 못하면서 그저 그 하나만 바라보며 머나먼 타국으로 제 자신을 던졌던 여자. 남편이 허망하게 지고 난 후, 주변의 압박을 이기지 못하여 아들에게 완벽을 요구하던 여자. 결국, 그녀가 아들에게 바랐던 건 이미 세상을 떠난 제 부군이었다.

그녀는 율의 어머니였다.

희아가 별빛 같은 미소를 머금고 말했다.

“오랜 시간 뒤에도 지금 마주한 얼굴들을 마주 보며 살 수 있으면 좋겠어.”

어린아이 같은 희망이지만 그 순수함이 너무나도 예뻐, 율은 웃었다.

“저도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안주安住는 제 방식이 아님에도, 철저한 계산하에 가장 합리적인 선택지를 찾는 게 그의 습관임에도, 희아가 웃으면 율 또한 그저 낙관적이 되어버린다. 믿고 싶어진다. 괜찮을 거라고. 속고 싶어진다. 여기에 있어도 된다고.

함께하는 순간이 바로 별이 빛나는 시간. 책에 나와 있는 활자로 이루어진 그 시간이, 지금 이 순간 흐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