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럽에서 만나 깃털처럼 가볍게 시작된 윤지아(여)와 김현진(남)

이름과 나이만 알고 있을 뿐, 서로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고 또 아무 것도 알려하지 않는 두 남녀의 기묘한 동거가 시작된다. ‘포옹까지 허용, 키스부터 금지’라는 이상한 조건을 달고.


지아의 독백 中

결혼을 위한 연애도, 섹스를 위한 연애도, 혹은 연애를 위한 섹스도 원치 않았다. 사랑과 섹스가 일치하는 관계? 그런 것을 바라지 않는 사람이 누가 있으랴. 하지만 살다보면 아무래도 나와는 연이 닿지 않는 것 같다고 여기게 되는 것들이 있는 법이다.
내게 필요한 건 오직 일회용의 섹스, 섹스에 일체의 다른 감정이나 계산이 섞여들지 않은 순도 100%의 섹스였다.


<본문 중에서>


위이이잉…… 목 뒤에서 울리는 헤어드라이기 소리가 꼭 매미울음소리 같다. 면을 삶기 위해 올려둔 스테인리스 들통에서는 칙칙거리며 김이 새어나온다. 계절이 몇 발짝쯤 물러난 한여름의 약간은 후텁지근하고 느슨한 오후 같다. 그의 손가락과 함께 내 머리칼 속을 자유롭게 헤집고 다니는 드라이기 속의 냉풍은 너무 오래 돌린 선풍기 바람처럼 미지근하다. 이 미지근한 바람을 타고 샴푸향이 날린다. 갑자기 숨이 막힌다.
“지아야…….”
그가 조금 잠긴 듯한 목소리로 내 이름을 부른다. 이름이 닿은 목 뒤에서부터 시작된 전율이 재빠르게 줄달음쳐 젖꼭지를 발딱 일으켜 세우고 손끝, 발끝을 간질인 뒤 방전된다. 나는 가만히 호흡을 가다듬는다.
“응? …… 왜?”
“단풍 들면 우리도 어디로 놀러 라도 갈까?”
“여름휴간 이미 다 써버렸는데…….”
“그땐 덥고 사람들 붐비는 덴 가기 싫다고 둘 다 집에만 있었잖아.”
“하지만 이제 휴가가 없는데.”
“멀리 말고 그냥 가까운 데. 휴일 날 하루 시간 내서 갔다 올 수 있을만한 곳으로 가는 건 어때?”
“어디 가 보고 싶은 곳 있어?”
“고궁에 갔다 올까? 창덕궁 후원이 가을에 무척 예쁘다고 하던데.”
그의 이야기에서 나는 ‘데이트’라는 단어를 떠올린다. 그리고 또 생각한다. 우리의 관계는 보통 연인들의 관계와는 완전히 반대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고. 섹스에서, 단순 동거로, 다시 데이트로, 이렇게 퇴행하는 우리의 관계는 어느 순간 완전한 무(無)의 상태로 되돌아가 버릴지도 모른다.
“갈 거지? 거기에 들어가려면 미리 예약해야 하거든.”
“고궁에도 예약을 해?”
“창덕궁 후원 안으로 들어갈 때만. 하루에 들어갈 수 있는 인원을 제한하고 있대. 일제 강점기 때는 비원(秘苑)이라고 불렸다고 하더라. 여전히 좀 비밀스럽지?”
“[비밀의 정원], 어렸을 때 참 재미있게 읽었었는데…….”
“너는 비밀을 좋아하니까…….”
그가 내 말린 머리칼을 손빗으로 빗으며 중얼거린다.


<미리보기>


우리들 뒤로 불꽃이 일렁이고 있다. 불꽃이 뒤쫓아 올 것만 같아 우리는 필사적으로 달린다. 최후의 심판을 맞은 겁 많은 사람들처럼, 손을 꼭 붙잡고. 어린 나와 나보다 머리 하나쯤 더 크지만 역시 어린 오빠와 함께.
아버지가, 그 방 안에, 술 취한 아버지가 동화 속 괴물처럼 무섭게 날뛰다 세상모르고 잠든 그 방안에, 닫힌 그 방 문 뒤에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우리는, 불꽃이 우리마저 삼켜버릴까 봐 뛰고 또 뛴다.
흘깃 돌아본, 불타는 집의 모습은 아름답다. 날은 흐리고, 엇비슷하게 지어진 고만고만한 집들은 모두 조용히 웅크리고 있는데 우리 집만 새빨간 꽃처럼 피어 활활 타오르고 있다. 언제나 초라해보이던 우리의 낡고 작은 집 위에서 불꽃이 춤을 추고 있는 모습은 아름답고 따뜻해 보인다.
아름다운 불의 꽃…… 왜 사람들이 불을 불꽃이라 부르는지 알 것 같다.
하아, 하아…….
우리는 차고 매운 숨을 몰아쉰다. 한참을 뛰어 우리가 당도한 곳은 낯설고 막다른 골목 끝이다.
“오빠, 이제 그만 집에 가자.”
한기가 전해지는 담벼락에 한참을 쪼그려 앉아 있던 내가 말한다.
“이제 그 집으로 돌아가지 못해.”
오빠가 하늘로 고개를 쳐든 채 대꾸한다.
오빠의 어깨 위에 얹힌 하늘은 거대한 잿빛 늑대 같다. 당장이라도 커다랗게 입을 버리고 달려들어 오빠와 나를 한입에 꿀꺽 삼켜버릴 것만 같다.
“정말? 왜?”
“너도 아까 봤잖아. 그 집이 불타는 걸.”
“그럼, 이제 우린 어떡해?”
나는 걱정과 신뢰가 뒤엉킨 마음으로 오빠를 올려다본다. 춥고 배고프고 아프다. 처음엔 춥고 배가 고프기만 했는데 계속 추위에 떨며 웅크리고 있었더니 누군가 나를 눈덩이 뭉치듯 꽁꽁 뭉쳐대는 것처럼 몸이 쑤신다.
“기다려 봐. 곧 우주선이 우리를 데리러 올 거야.”
“우주선? 외계인이 타고 있는?”
“응. 그 우주선.”
“우주선이 왜 우리를 데리러 와?”
“거기엔 엄마가 타고 있으니까. 사실 우리 엄마는 외계인이거든.”
우리는 아무도 아빠에 대한 이야기는 하지 않는다.
“우주선이 빨리 왔으면 좋겠다. 추워…….”
나는 오빠처럼 고개를 젖혀 하늘을 바라본다.
“텔레파시를 보내자.”
오빠가 말한다. 그래서 우리는 두 손과 이마를 맞대고 마음속으로 간절히, 간절히 우주선을 부른다. 어서 이 텔레파시를 듣고 우리를 데리러 오라고.
집에서 뛰쳐나올 즈음부터 내리기 시작한 눈이 골목길의 담장과 쓰레기 더미 위에 차분히 쌓이고, 공기는 시리도록 맑고 차다. 꼭 우리 집 냉장고 속처럼 텅텅 빈 채로.
나는 지쳐 다시 벽에 기대앉는다. 졸음이 와 가물거리는 눈꺼풀 사이로 우주선이 지상으로 내려오는 양 세상이 온통 하얗게 빛나는 것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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