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니퍼는 아버지의 부름을 받고서야 밤낮으로 눈앞에 아른거리는, 회색 눈동자의 호남에 대한 상념에서 깨어났다. 그녀는 수틀을 내려놓으며 브렌나에게 무슨 일이냐는 듯 궁금한 표정을 지어 보인 후 초록색 망토를 바짝 여미면서 가족실을 나섰다. 2층 복도를 걷던 그녀는 언쟁을 벌이는 남자들의 목소리를 듣고 걸음을 멈췄다. 거실은 친족을 비롯해 인근 영지에서 온 귀족들로 가득 차 있었다. 그들의 거친 얼굴은 저승사자처럼 엄숙하게 굳어 있었다. 거기에는 베네딕트 수사도 있었다. 그의 엄격하고 차가운 얼굴을 보자 제니퍼는 경계심과 수치심으로 기가 죽었다.
그녀가 베네딕트 수사에게 로이스 웨스트모어랜드와 저질렀던 죄를 고백하자 그는 입술이 부르틀 정도로 장황하게 그녀를 비난했다. 그녀는 아직도 그 잔소리가 생생히 떠올랐다.
‘그대는 남자에 대한 주체할 수 없는 욕망 때문에 그대의 아버지와 조국, 그리고 주님을 욕되게 했다. 그대가 욕정으로 인한 죄를 짓지 않으려 했다면, 명예로이 죽음을 택해야 했다.’
평소 제니퍼는 죄를 고백하고 나면 깨끗이 씻겨진 느낌이었지만 그땐 더욱 더럽혀져 영원히 구원받지 못할 것만 같았다.
후에 생각해보니, 베네딕트 수사가 그녀가 욕되게 한 상대들을 나열하면서 주님을 맨 마지막으로 거론한 건 이상한 일이었다. 그녀는 자신과 웨스트모어랜드 사이에 일어났던 일을 사실은 즐기고 있었던 것에 대해 오래도록 죄책감을 느꼈지만, 자신이 맺었던 거래에 대해서는 주님도 비난하지 않을 것이라 믿었다. 처음부터 로이스는 제니퍼의 생명이 아닌 몸을 원했던 것이다. 물론 남편이 아닌 남자와의 잠자리를 즐긴 건 잘못이지만, 그 거래는 브렌나의 목숨을 구하려는 숭고한 목적이 있었다. 적어도 그녀는 그렇게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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