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작품 소개

“음악 듣고. 영화 보고. 맛있는 것도 먹자. 놀러 와.”

“초대해주면.”

“초대하잖아, 지금.”

아이스크림 마니아이자 식품뉴스의 기자 윤세랑. 취재차 뉴욕에 갔다가 아이스크림 한 통을 두고 격전을 벌인 원수, 소매치기 당한 지갑을 찾아준 은인, 거기다 회사에 떨어진 낙하산 임시 대표는 모두 동일인, 강준영이었다!

뉴욕에서건 서울에서건 투닥거리던 두 사람은 은인, 행인, 직장인, 귀인, 연인…… 세상의 모든 이름과 달콤함이 가득한 사이가 되어가는데…….

“생각해봤어? 인 자로 끝나는 말.”

“원하는 답이 있어?”

“질문을 질문으로 반사하네.”

“생각해둔 게 있으니까 물어봤을 거잖아.”

“윤세랑. 밀당하지 마. 못 알아듣는 척도 하지 말고. 나는…….”

곧게 쏟아져 내리는 눈빛. 보기 좋게 솟아오른 목울대가 움직이고, 고백이 흘러나왔다.

“나는 너한테 올인이야.”

하아…….

“지금부터 내내, 올인일 거야.”

2. 작가 소개

나자혜

‘사랑과 지혜’라는 의미의 이름을 가진 사람

야구팬. Runner.

2005년부터 소설을 쓰고 있다.

▣ 출간작

아이스크림처럼, 레몬처럼

별의 바다

얼음불꽃

13월의 연인들

꿈꾸는 오아시스

우리들의 시간꽃

눈의 숲에서 봄을 만나다

눈의 성에서 너를 만나다

흑과 백

3. 차례

#8. 벗꽃우화

#9. 어두운 곳에서 기척을 내는 갸륵한 빛처럼

#10. 양파 같은 사람

#11. 내내 너를 초대하는 중일 거야

#12. 내 모든 달콤한 동사들의 목적어

#13. 낭만과 야만 사이

4. 미리 보기

스노 캐슬의 스위트룸. 거실 테이블에 와인과 초콜릿 탑이 세팅되어 있었다. 준영이 카드회사에서 VVVIP 고객들에게 보낸 서머 스페셜 쿠폰을 썼다고 했다.

“쿠폰 날리면 아깝잖아.”

“마침 이 호텔에서 행사가 있었네.”

세랑은 호화스러운 룸을 둘러보았다. 가족여행이나 출장을 가서 묵었던 곳과는 차원이 달랐다. 압도적인 규모의 룸에 고급스러운 인테리어였다. 잡지의 화보 속으로 빨려 들어온 기분이었다.

“바보.”

“어?”

“편집장님한테 부탁해서 오늘 행사 초대장 얻어낸 거야. 행사 날짜에 맞춰서 룸 예약했고.”

어. 그럼 편집장님이 둘이서 같이 가라고 지시하신 이유가……?

“원래는 편집장님이 남편하고 오시기로 되어 있었는데, 가로챈 거지. 빚졌으니까 이제 갚아야 해. 놀고먹는 거 진짜 눈치 보이게 생겼어.”

강준영이 누구에게 아쉬운 소리를 하는 게 상상이 안 됐다.

“왜 그랬어?”

“여기 오자고 말하기가 어색해서.”

준영이 옅은 한숨을 내쉬고 타이를 잡아당겼다. 매듭이 느슨해진 남색 타이가 흰 셔츠 위에 늘어졌다. 흐트러진 모습이 섹시했다. 단정한 어른스러움이 사라지고, 반항미가 풍겼다.

준영은 와인을 잔에 따라 세랑에게 건넸다. 잔을 들고 와인을 내려다보다가 세랑이 물었다.

“너는?”

“내가 마시면 오늘 밤에 너 못 데려다줘. 그래도 상관없으면 마시고.”

“마시지 마!”

하! 말을 꺼내기가 무섭게. 사람을 음흉한 놈으로 만들어버리네.

술이 약한 그였다. 어지간한 자리에선 술을 아예 입에 안 댔다. 그래도 분위기에 따라 와인 몇 모금 정도는 하는데. 세랑이 정색하고 제지하니 체한 듯 속이 답답해졌다.

내일 아침까진 여기 있어도 되는데. 오늘 밤에 같이 있자고 하면 겁먹으려나?

세랑과 보내는 시간이 좋았다. 밥 먹고, 이야기하고, 웃거나 투덕거리는 모든 순간들이 즐거웠다. 사무실 구석 자리에 웅크리고서, 일하는 세랑을 훔쳐보는 것조차 달콤했다. 유일한 문제라면, 그런 시간이 빛의 속도로 지나간다는 것.

난생처음 찾아든 봄바람 같은 설렘. 세랑을 붙들면 시간도 붙들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속은 타지만 서두르고 싶지 않았다. 어설프게 굴다가 기껏 쌓은 유대감을 무너뜨릴까 봐 두려웠다.

세랑이 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붉은 와인이 입술을 적시고, 벌어진 입술 사이로 흘러들었다. 입술이 옆으로 휘었다. 속눈썹이 삼박삼박. 커다란 눈이 초롱초롱.

잔이 입에서 떨어지는가 싶더니 다시 가까워졌다. 또 한 모금. 첫 모금보다 길게.

“맛있다.”

세랑이 입술을 포개 말았다가 생긋 웃었다. 입술에 밴 와인이 부러웠다. 눈이 마주치자 세랑이 잔을 테이블에 내려놓고 발코니로 나갔다.

룸에 딸린 발코니는 옥상의 광장이었다. 대리석 바닥에 테이블과 벤치가 있었다. 세팅만 하면 파티를 할 수도 있을 만큼 넓었다.

세랑이 난간에 기대 야경을 감상했다. 정면에 남산 타워가 보였다. 밤은 반짝이 가루가 뿌려진 검은 색종이 같았다.

준영은 세랑에게 다가갔다.

“손 줘봐.”

세랑이 그를 돌아보더니 한 손을 내밀었다. 준영은 재킷 안주머니에서 꺼낸 핀을 세랑의 손바닥에 올렸다. 다이아몬드가 촘촘히 박힌 사과 모양 백금 핀이었다.

“선물.”

“어……”

세랑은 달빛을 받아 반짝이는 핀을 내려다보았다. 찬란한 핀이 실물 같지 않았다. 동화 속 그림도 같고 빛의 속임수인 것도 같았다. 얼떨떨해서 고맙다는 말조차 안 나왔다.

“마음에 들었으면 좋겠다.”

준영의 속삭임에 정신이 퍼뜩 들었다.

“예뻐.”

사무실에서 꽂기엔 과하지만.

“사천구백팔십사만 원 남았다.”

뭐? 아, 보너스.

뭐어어어? 신발 사고 육천 얼마였는데. 사천…… 뭐어? 이 핀이…… 이천만 원짜리?

세랑은 멍하니 물었다.

“이거…… 잃어버리면 어떡해?”

“마음이 남겠지.”

준영이 핀을 집어 들었다. 앞머리를 옆으로 넘기고 핀을 찔러주었다. 머리카락을 스치는 손길이 감질나서 세랑은 어깨를 웅크렸다. 이마가 간질간질, 목덜미가 화끈화끈. 숨 쉬는 것조차 조심스러웠다.

“금속 플러스 광물 플러스 내 마음이야. 잃어버리면 금속하고 광물은 날아가고 마음이 남는 거지. 안 그래?”

핀이 고정되었나 확인한 준영이 고개를 옆으로 틀었다. 눈길이 마주치다 엇갈렸다.

“마음, 안 남아?”

“남아. 남는데…….”

“내 예산 내에서 너한테 어울릴 만한 걸로 샀어. 뭐가 문제야?”

“화려해서.”

“내 진심이, 화려해.”

고요한 말투에 깃든 확신. 쏟아져 내리는 눈길이 이 밤을 닮았다. 어둑하고 후덥지근하고 밀밀했다.

“진심이 소박해야 한다는 법은 없잖아. 안 그래?”

준영이 다른 환경에서 다른 기준을 가지고 산다는 것이 불현듯 실감났다.

“생각해봤어? 인 자로 끝나는 말.”

“원하는 답이 있어?”

“질문을 질문으로 반사하네.”

“생각해둔 게 있으니까 물어봤을 거잖아.”

“절대 먼저 말을 못 하시겠다?”

준영이 괘씸하단 듯 핏 웃었다.

“윤세랑. 밀당하지 마. 못 알아듣는 척도 하지 말고. 나는…….”

곧게 쏟아져 내리는 눈빛. 보기 좋게 솟아오른 목울대가 움직이고, 고백이 흘러나왔다.

“나는 너한테 올인이야.”

하아…….

“지금부터 내내, 올인일 거야.”

“아, 어떡해?”

어깨를 움츠린 세랑은 두 손으로 눈을 가렸다. 준영의 몸이 긴장했다. 후, 한숨 소리가 나고 팽팽한 속삭임이 떨어졌다.

“거절이야?”

“눈부셔.”

“음?”

“네가 눈부셔.”

이 밤이 눈부셔. 어둠조차 반짝거려. 아찔해. 감당이 안 돼.

준영의 손이 손가락 마디에 와닿았다. 감전된 듯 저릿해서 세랑은 흡, 숨을 들이마셨다. 손가락에 선을 긋듯 움직이는 손. 살갗에 온기를 새긴 손이 물러났다. 그리고 다시 다가왔다.

준영의 굽혀진 손마디가 손등에 부딪쳤다. 노크하듯이. 정중하게. 서두르지 않고. 조금은 수줍게.

“똑똑.”

감미로운 숨결이 흩어졌다.

세랑은 미닫이문을 열 듯 손을 치웠다. 다가올 것 같던 준영의 손이 망설이다 물러났다. 시야에 준영의 얼굴이 들어왔다. 물기 어린 눈동자가 짙고, 뺨이 상기되어 있었다.

“아직도 눈부셔?”

“오늘 밤에 내내 눈부셨어.”

“도저히 못 봐줄 정도야?”

놀리는 말투에도 긴장이 풀리지 않았다. 오도카니 있자 준영이 고개를 옆으로 돌리고 한숨을 내쉬었다. 어둠을 훑던 시선이 느리게 그녀에게 옮겨왔다.

“우리 만났을 때, 내가 너한테 처음으로 한 말 기억해?”

처음으로 한 말?

“뉴욕에서.”

세랑은 기억을 더듬었다. 기다리던 준영이 답답했는지 답을 알려주었다.

“Excuse me.”

아, 맞다. 아이스크림 통 위에서 손이 겹쳤을 때, 그렇게 말했지.

“그 말을 다시 해야 할 것 같아.”

“어?”

“내가 정말……, 이렇게 될 줄은 몰랐는데……. 윤세랑.”

억울하다는 표정을 짓다가 준영이 고개를 숙였다.

“Excuse me.”

입김 같은 속삭임. 볼에 입술이 닿으며 춧 소리가 났다. 천둥이 세상을 울리는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