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작품 소개

“지금 이 순간부터 건후 씨와 바른 결혼 생활을 하고 싶어요.”

“해. 대신 내 장단은 바라지 말았으면 좋겠군. 바른 결혼 생활? 그래도 아내니까 건투는 빌어줘야겠지. 열심히 해봐.”

유림은 건후와 꼭 결혼을 해야만 했다. 집안끼리의 정략혼이지만 성실하게 임하려 하는데, 도통 이 남자 도건후가 협조해주지 않는다.

여러 가지 의미로 가슴 뛰는 신혼생활, 도건후와 허유림을 휩쓸어버린 그 물결의 종착지는 어디일까.

“그렇게까지 내 취향이 되려는 이유가 뭐야?”

그래도 혹시나 하는 기대로 물어본다.

“그야 건후 씬 내 남편이잖아요.”

“…….”

“결혼을 했으니까 이왕이면 남편 취향이 되면 좋잖아요.”

“결혼하지 않았으면 뒤도 돌아보지 않았겠군.”

기대가 충족되지 못했기에 말해줄 수가 없다.

그 내면에 내가 없어서 말할 수가 없다.

당신이 내 취향이라서 나는 생각보다 괴롭다.

2. 작가 소개

윤아진입니다.

http://blog.naver.com/present_aa

3. 차례

#프롤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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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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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4. 미리 보기

현관문을 열고 들어왔던 건후는 다녀왔느냐며 인사하는 유림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본능적으로 아래로 시선을 내렸다. 다가오는 아내에게서 어딘지 모르게 휑하다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눈길을 사로잡았던 정체를 확인한 순간 건후의 숨이 멎었다.

“……!”

숨 쉬는 법을 잊게 만든 정체는 바로 가터벨트였다. 늘씬한 다리를 감싸고 있는 것은 속옷이었다.

잘록한 원피스 자락 아래로 드러난 살색과 검정색에 건후의 눈앞이 새하얗게 변했다.

퇴근이 무섭다고 했잖아.

야근하고 싶다.

출근하고 싶어.

넥타이를 푸는 것만으로 옥죄어오는 열기가 사라질 것 같지는 않지만 뭐라도 해야 했기에 건후는 넥타이 매듭을 잡아끌었다. 이어서 셔츠 단추까지 하나 풀자 그제야 약간의 숨통이 트였다.

“바른 결혼 생활은 페이크고 결혼을 유지하고 있는 상황에 불만이라도 있나?”

“네?”

“그게 아니라면 도대체 나한테 왜 이러지? 내가 뭐 서운하게 했어?”

그렇다고 말해주길 간절히 바랐다. 그냥 엿 먹여주길 바랐다.

“허유림 씬 본인이 얼마나 공격적인 줄 모르나 본데.”

“공격적이요?”

“제발 알기 바라. 주제 파악도 하고 살아야지.”

건후가 조금 잠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본인의 공격력으로 상대방이 녹다운 될 거 같은 참담한 심정을 아내는 알고 있는지.

마녀에 구미호에 팔색조의 젠장을 모두 다 가진 여자이니까 이미 눈치챘을 터다. 그걸 알면서도 속절없이 이성을 내주고 마는 자신이야말로 문제가 있는 것 같아 건후가 탄식을 쏟아냈다.

“왜 그래요, 어디 아파요?”

유림은 어딘가 모르게 힘겨워 보이는 건후를 조심스럽게 살폈다.

“김 실장님 아니, 황 박사님께 연락드릴까요?”

공격적이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 궁금하지만 건후의 상태부터 살펴야 했다. 그녀가 한 걸음 움직이자 그가 한 걸음 물러났다. 또다시 한 걸음 다가가자 또 한 걸음 물러났다. 우연이 반복되면 의도가 포함된 거라고 했었나. 이상함을 감지한 유림이 건후를 불렀다.

“건후 씨?”

몇 걸음 움직였더니 뒤는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는 현관문이었다. 매번 이 현관 앞에서 이게 무슨 황망한 짓인지. 다른 신혼부부들도 현관을 넘기가 이렇게 힘든 건가. 아니면 자신만 이런 건가. 마치 벼랑 끝에 내몰린 처지와도 같은 건후가 유림을 바라보며 말했다.

“다가오지 말고 거기서 얘기하지. 말 나온 김에 앞으론 허락받고 다가와. 그러는 게 좋겠군.”

“다가가는 걸 허락받으라구요?”

“그래.”

“미안하지만 그건 안 돼요. 들어줄 수 없어요.”

뭐가 이렇게 뻔뻔해. 당신 공격적이라고.

“우리가 더 친해져야 한다고 했잖아요! 밥상은 스스로 차리라고 했잖아요.”

“…….”

“난 최선을 다하고 있는 거예요. 우리의 바른 결혼 생활을 위해서.”

유림이 말했다.

저라고 좋아서 취향에 어긋나는 이런 속옷을 입었을까.

“입는 방법도 몰라서 내가 몇 번을 벗고 입었는데.”

“입는 방법을 모르는 속옷을 왜 사지?”

“건후 씨와 친해지려고 샀죠!”

하필이면 속옷 박스에 착용 설명서가 없는 바람에 입고 벗길 반복하다가 겨우 입었다. 하지만 문제는 이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도저히 속옷만 입고 있을 수가 없어 무슨 옷을 찾아 입을까 고민을 하다가 가진 옷 중에 가장 짧은 원피스를 입었다. 그런데도 부끄러움, 수치심, 불안 등이 떨쳐지지가 않아 와인을 마셨다.

그러니까 이번에는 확실히 술주정이 맞는 것이다. 일전 그의 방문을 두드렸을 때와는 다르게.

“근데 건후 씨는 자꾸 피하기만 하고 협조도 안 해주고. 은근 못됐어.”

“뭐?”

“도건후 씨 좋은 사람이잖아요. 좋은 사람인데 왜 그래요, 응?”

미친 거냐는 말이 목구멍을 비집고 나와야 정상인데,

“왜 내 말 안 들어줘요. 속상하게.”

건후는 말을 잇지 못했다. 트림을 했을 때 보았던 모습과 흡사했기 때문이었다. 제 아내는 부끄러우면 앙앙거리는 모양이었다. 그것이 미쳐 보여야 하고 정신 나간 거로 보여야 하는데, 혼은 자신이 나간 것 같았다.

“난 도건후 씨 대외적인 아내 역할 잘했는데, 왜 도건후 씬 내 남편 안 해줘요?”

적반하장도 유분수라는 것을 알지만 울컥한 마음이 끝도 없이 흘러나왔다.

우리 삼촌과 이모들은 조카인 날 부끄러워하는데, 엄마는 남편과 잘 지내라고 하는데, 아빠는 경선을 앞두고 있는데. 난 지금 당신 말고 기댈 사람이 없는데, 남편인 당신이 도와줘야 하는데.

왜 자꾸만 나 피해요?

말을 멈춘 유림은 몸을 움직여서 숨겨두었던 와인을 꺼냈다.

“금요일 밤이라서 같이 먹으려구 와인도 준비했는데.”

“그게 왜 거기서 나오지. 대체 어디서 꺼낸 거야.”

“어디서 꺼낸 게 중요한 게 아니라구요. 부부가 같이 와인을 마시는 게 중요한 거지.”

와인 냉장고에 있어야 할 와인이 방망이처럼 뚝딱 나타나는 모습이 황당했다. 이성을 상실한 것 같은 유림의 행동이 술 때문이라는 걸 알게 된 건후가 당부를 건넸다.

“허유림 씨 어디 가서 술 마시지 마.”

공격력이 상승하는 것 같으니까.

“나 어디 가서 함부로 술 먹고 그러지 않아요.”

“대신 집에서 혼자 먹고 술주정을 하지.”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는 유림은 자책의 의미로 입술을 감쳐물었다. 그러자 붉게 오른 뺨이 부풀어 올랐다. 술기운이 머릿속까지 번진 그녀는 무슨 행동을 하고 있는지 인지하지 못했다.

“…….”

건후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그냥 던진 말인데도 대답을 종용하고 싶어졌다. 비즈니스 부부에서 남편이 요구할 수 있는 권한이 궁금해진다.

건후가 자신을 어떻게 보는지도 모른 채 유림은 속옷마저도 벗겨지지 않을 거 같아서 울적해했다. 근심은 자책으로 이어졌다. 도대체 뭐가 잘못된 건지, 유림은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효과 좋다고 했는데.”

“무슨 효과?”

“벗기지 않고는 못 버티는 효과요.”

“…….”

“분명 직방이라고 했는데.”

“그런 말 쓰지 마.”

“직방이 왜요?”

“잘못된 표현일뿐더러 상당히 저급하군.”

“술도 먹지 못하게 하고, 말도 못 쓰게 하고, 할 건 다 하면서 얜 왜 그냥 두는데요?”

확실히 지난번에 그의 방문을 두드렸던 것은 주사가 아니었나 보다. 생긋거리는 게 아내의 특기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 외의 표정은 거의 보지 못했는데 오늘따라 표정이 참 풍부했다.

그는 어쩐지 뾰로통한 표정을 짓고 있는 그녀의 뺨을 찔러보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다. 지금 이 불필요한 열기가 다른 곳으로 관심을 보이니 그나마 다행인 듯싶었다. 그렇지 않으면 한곳으로 몰려 그가 막을 새도 없이 터질 것만 같았다.

건후는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자신이 입은 속옷을 빼꼼히 내려다보고 있는 유림에게 말했다.

“어디서 뭘 보고 다니는지 모르겠지만 잘못 알고 있는 거 같군.”

“네?”

“허유림 씨가 입고 있는 건 벗기는 게 아니야.”

“그게 무슨 말이에요? 이거 속옷인데요.”

유림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 편협한 사고…… 됐군. 오늘은 그만하지.”

젠장.

희한하게 아내에게 말리는 듯한 기분이 들어 건후는 유림을 지나쳐 거실로 들어갔다.

소파 테이블에는 목이 긴 와인잔 두 개와 치즈를 기본으로 한 다양한 안주가 놓여 있었다. 어디서 튀어나왔는지 알 수 없는 와인이 이 자리를 빛내기 위한 수단이라는 것은 확실했다.

불필요한 열기로 피로가 몰려오는 건후가 손으로 뒷덜미를 문질렀다. 그사이 유림이 다가왔다.

“건후 씨는 이런 속옷 많이 봤어요?”

“뭐?”

“그래서 벗기기 싫은 거예요?”

이 무슨 황당무계한 소리인지. 어처구니가 없어 건후의 입술에서 헛숨이 터졌다.

그러거나 말거나 잘못된 이유를 찾은 유림은 진지했다.

“그랬구나. 그래서 그랬어. 눈에 익었으니까 건후 씨 취향이 아니었던 거야.”

“뭔가 대단히 불쾌한 오해를 하고 있는 모양인데, 거기까지만 해.”

유림의 커다란 눈이 불신을 품은 채 새초롬하게 늘어지자 건후가 속으로 ‘젠장’을 외쳤다. 술에 취한 아내는 마녀와 구미호만으로는 모자랐는지 요물로 변해 제 앞에서 알짱거린다.

“진작 말을 해주지 그랬어요.”

“나한테 물어보고 샀나?”

안 물어보고 샀잖아!

유림이 억울한 표정을 지으니 건후도 덩달아 이유 없이 억울해졌다.

“좋아요. 그럼 건후 씨 취향이 어떤 건지 가르쳐줘요.”

남편 속옷 취향을 아는 것도 부부의 일이다.

“오늘 속옷 매장에서 이것저것 담아 왔으니까 그중에서 고르면 되겠다. 잠시만 기다려봐요.”

배시시 웃은 유림이 건후의 품으로 와인을 건넨 후 방으로 가서 캐리어를 가져왔다. 속옷을 은밀하게 감춰둔 그녀가 꼼지락거리는 손놀림으로 속옷 하나를 꺼냈다. 그러고는 가만히 있는 건후의 앞으로 속옷을 흔들며 산신령처럼 진중하게 입을 뗐다.

“이거예요?”

하얀색 레이스가 팔랑거린다.

“아니면 혹시 이건가.”

이번에는 빨간색.

“아니면 얘?”

이번에는 끈 같지도 않은 가느다란 끈이 나풀거린다. 유림은 여러 벌의 속옷을 들고서 얼른 취향을 말해보라는 듯 커다란 눈을 반짝거렸다. 이런 경우 산신령은 번쩍거리는 것에 현혹되지 않은 정직한 나무꾼에게 모든 도끼를 선물했다고 한다. 산신령이 되겠다면 마다할 필요는 없다.

“굳이 말을 해주자면 내 취향은 속옷이 아니라 속옷을 입고 있는 사람쯤이 되겠군.”

“…….”

“그 사람이 취향이라면 걸치고 있는 건 그저 천 조각에 불과하겠지.”

“…….”

“어차피 벗길 테니까. 내 품 아래에서는 입지 못하게 될 테니까.”

속옷 취향에 연연해본 적이 없던 건후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그의 솔직함과 달리 애석하게도 유림은 산신령이 아니기에 모든 속옷 대신 다른 걸 내놓았다.

“내가 건후 씨 취향이 아니에요?”

지나치게 취향이라서 문제였다. 뉴욕 크리스티 경매장 건물 앞에서 말간 시선을 마주한 순간부터 취향이었다. 살가운 목소리로 오빠를 찾는 여자에게 눈길이 갔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첫눈에 반하는 현상을 받아들이지 못해 왜인지 의문이 차오르는 순간을 확인하고 싶을 때도,

“맞구나.”

당신은 내 취향이었다.

지극히 편협적이게.

그래서 난 허유림 씨와 비즈니스만 한다고 해놓고 술주정을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다.

“내가 어떻게 하면 건후 씨 취향이 될 수 있어요?”

뭐든 다 하겠다는 의지가 느껴진다. 그것이 썩 좋지만은 않은, 오히려 불쾌한 건후가 유림에게 다가갔다.

바닥에 앉아 있는 그녀가 고개를 들어 그를 올려다봤다.

캐리어에서 속옷을 꺼내느라 아무렇게나 앉아 있는 유림은 평소와 달리 잔뜩 흐트러져 있었다. 몸과 태도는 이렇게 흐트러져 있는데 내면은 아니겠지. 도건후에게 줄 것은 아무것도 없겠지.

“그렇게까지 내 취향이 되려는 이유가 뭐야?”

그래도 혹시나 하는 기대로 물어본다.

“그야 건후 씬 내 남편이잖아요.”

“…….”

“결혼을 했으니까 이왕이면 남편 취향이 되면 좋잖아요.”

“결혼하지 않았으면 뒤도 돌아보지 않았겠군.”

기대가 충족되지 못했기에 말해줄 수가 없다. 그 내면에 내가 없어서 말할 수가 없다.

당신이 내 취향이라서 나는 생각보다 괴롭다. 상처 입히고 싶은 만큼. 딱 그만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