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작품 소개

“그쪽한테 책임지라고 할까 봐 겁나요? 그쪽 같은 사람이 아빠라는 사실……. 아이가 절대로 모르게 할 거야.”

기억에도 없는 하룻밤으로 인해 어느 날 갑자기 아이가 생겼다. 지우라는 협박도 통하지 않는 스물네 살의 아이 엄마는 좋은 아빠가 될 게 아니면 책임질 생각도 말라고 한다. 난 좋은 부모를 가져본 적도 없고, 아빠는 처음인데……. 그게 가능할까?

“내가 언제 같이 살면서 애를 책임지겠다고 했어?”

“그러니까 다 필요 없다고요. 왜 내 아이가 당신 호적에 들어가고 당신 성을 따라야 하는데요?”

“기껏 생각 바꿔서 미혼모 딱지 떼어주고 애도 내 자식으로 인정해주겠다는데 거절하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그쪽은 생각을 바꾼 게 아니라 변덕을 부리고 있는 거죠. 나는 내 인생을 걸고 이 아이를 지키기로 했어요. 당신 인정 같은 거 없어도 나랑 아이, 행복하게 잘 살 거라고요.”

2. 작가 소개

현아진

건강하고 느린 삶을 지향.

겨울과 여행, 바다 속 동물을 사랑한다.

3. 차례

#34장

#35장

#36장

#37장

#38장

#39장

#40장

#41장

#42장

#43장

#44장

#45장

#46장

#47장

#48장

#49장

#50장

#51장

#52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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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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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장

#58장

#59장

#60장

#61장

#62장

#63장

#64장

#65장

#66장

4. 미리 보기

정확히 한 시간 뒤, 재하의 경호팀은 동원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동원해 지시를 이행했다. 연과 같은 학과 선배들이라고 밝혀진 남자들 중 한 명은 집에서, 다른 한 명은 아르바이트 중에 끌려왔다.

“상무님. 데려왔습니다.”

약간의 반항을 하며 경호원들에게 붙잡혀 들어선 남자들을 힐끗 본 재하는 손목에 찬 고가의 시계를 끌렀다.

“여기가 어디라고 알고 왔어?”

두 남자는 서로의 눈치를 보기만 할 뿐 바로 답하지 못했다. 넥타이도 잡아당겨 끄른 재하는 커프스를 뺀 와이셔츠 소매를 걷어 올리며 말했다.

“바닥에 꿇어 앉혀.”

“대체 왜 이러세요!”

“당신들 뭐야. 어!”

호기롭게 소리치는 두 사람은 경호원들에게 이끌려 나란히 바닥에 꿇어 앉혀졌다. 이 팀장에게서 대강의 내용을 전달받은 한 실장은 그들을 일말의 동정심 하나 없이 흘겨봤다.

“당신 누구야. 누군데…… 악!”

재하는 큰 보폭으로 걸어가 자신을 올려다보는 남자의 머리채를 잡고 고개를 꺾었다.

“내가 왜 이럴까? 몰라서 묻는 거야, 아니면 멍청해서 묻는 거야?”

“으윽.”

“서연 알지?”

“서, 서연?”

순간 이를 악문 재하가 연의 이름을 내뱉은 남자의 뺨을 때리려고 번쩍 손을 올렸다. 두 눈을 질끈 감은 한 실장은 재하에게서 그를 때리던 재일의 모습을 떠올리지 않기 위해 애썼다.

“어디서 감히 그 이름을 입에 올려.”

손찌검을 할 때 익숙히 들리는 마찰소리가 아닌 노여움이 가득한 재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감았던 눈을 뜬 한 실장은 공중에서 주먹을 말아 내리는 재하를 볼 수 있었다.

“묻는 말에 다른 말은 필요 없어. 네, 아니요. 둘 중 하나만 골라서 대답해.”

“네, 네.”

남자는 이미 자신을 때리려고 시도한 재하에게 공포를 느끼며 무조건적으로 고개를 주억이며 대답했다. 재하는 파르르 떨리는 주먹을 쫙 폈다.

“틀어.”

손을 턴 재하가 돌아서며 말하자 이 팀장은 들고 있던 태블릿PC를 그들 앞으로 가져가 CCTV영상을 틀었다. 미리 영상을 확인했었던 그는 재하가 등장하기 전까지만 그들에게 보여주고 재생을 중지했다. 눈앞에서 영상을 본 남자들의 표정은 비슷하게 사색이 되어버렸다.

“이게 뭐 어쨌다고요? 난 모르는 일이야!”

비틀대는 연을 끌고 올라가던 놈의 뒤를 신나게 졸졸 쫓던 남자가 발악하는 모습에 재하는 무미건조한 웃음을 터뜨렸다.

“기억이 안 나?”

“그, 그래. 기억 안 나는 일이야.”

남자의 되도 앉는 변명을 비웃은 재하는 책상 쪽으로 걸어갔다.

“기억나게 해줄게 그럼.”

누구도 말릴 틈 없이 재하의 이름이 적힌 명패가 남자에게로 날아갔다.

“으악!”

둔탁한 소리와 함께 남자가 몸을 구부리며 비명을 질러댔다. 정통으로 맞지 않고 바닥에 튕겨진 명패에 부딪힌 정도였지만 아프지 않을 수는 없을 정도의 통증이었다. 재하는 엄살이 뒤섞여 숨이 넘어갈 듯 엎어져서 우는 남자의 머리채를 잡아 올렸다.

“어때? 이제 기억나지?”

이제는 웃음기도 없는 재하의 모습에 이 팀장을 제외한 경호팀 전원은 저절로 식은땀을 흘렸다. 튕겨진 명패에 부딪힌 턱을 감싼 남자는 살기 위해 미친 듯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재하에게 뺨을 맞을 뻔했던 다른 남자는 숨소리조차 줄이며 쥐 죽은 듯 있었다.

새빨개진 턱에서 손을 뗀 남자는 눈물, 콧물 쏟으며 재하에게 두 손을 모아 빌기 시작했다.

“살려주세요. 사, 살려주세요.”

“왜 살려달라고 해? 누가 죽인대?”

“잘못, 잘못했습니다.”

“이 새끼가 혼자 꾸민 일이에요!”

거리낌 없이 사람에게 명패를 던지는 재하를 보며 입을 다물고 있던 남자가 바닥에 머리를 조아리며 소리쳤다.

“진짭니다. 전 아무 짓도 안 했어요.”

“아무 짓도 안 해?”

질질 짜는 남자에게서 손을 떼고 일어선 재하는 엎어져 있는 남자의 어깨를 발로 밀어 넘어뜨렸다.

“니들이 아무 짓을 안 했다고?”

온몸에서 팔팔 끓어오르던 피가 모조리 식는 느낌이었다. 안 그래도 간당간당하던 이성이 끊어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밟아.”

“예?”

“밟아 죽여.”

흰자위의 핏줄들이 터지며 빨갛게 충혈된 눈을 바라본 이 팀장은 재하에게서 남자들을 가리고 섰다.

“내 말 못 들었어?”

재하는 당장이라도 그들을 정말 어떻게 할 것만 같았다. 한 실장은 위험해지는 분위기를 감지하고 흐느끼는 남자 둘을 노려보다 재하에게 다가갔다.

“재하야.”

“못하겠다 이거지? 좋아.”

거친 숨을 몰아쉰 재하는 바닥에 나뒹굴고 있는 명패를 한 손으로 집어 들었다. 소리 없이 기함한 한 실장은 두 손을 좌우로 펼치며 재하를 막아섰다.

“안 돼. 재하야. 이제 그만해.”

“껴들지 마.”

“그러다 정말 죽어.”

“죽으라고 해.”

“재하야!”

괴성 같은 비명을 지르며 거품까지 물기 직전인 남자와 몸을 말고 덜덜 떠는 남자를 살리기 위함은 아니었다. 한 실장은 오로지 재하를 위해서였고 때문에 한 걸음도 물러설 수 없었다. 재하는 명패를 쥐고서 그녀를 원망스럽게 노려봤다.

“안 비켜?”

“난 못 비켜.”

“저 새끼들 살려둘 생각이었으면 데려오라고도 안 했어. 비켜.”

“나도 저것들이 잘했다는 건 절대 아니야. 하지만 재하야.”

한 실장은 일부러 재하에게 가까이 다가가 속닥였다. 그의 눈을 보면서 할 말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그래도 네가 서연 씨를 만났잖아.”

지금 이 순간 가장 듣고 싶지 않았던 말을 듣고 만 충격의 여파는 컸다. 쿵! 명패가 무겁게 바닥으로 떨어졌다. 재하는 아무 말도 못한 채 덜덜 떨리는 얼굴을 쓸어내리며 한 실장에게서 돌아섰다. 재하의 주먹이 책상을 내려쳤다.

못할 말을 해서라도 재하를 말리는 데 성공한 한 실장은 눈에서 흐르는 후회의 눈물을 닦으며 이 팀장을 바라봤다. 얼른 남자 둘을 내보내라고 눈짓했다.

“너. 너. 따라와.”

이 팀장은 가장 힘 좋은 팀원을 골라 제대로 일어서지 못하는 남자들을 한쪽 어깨에 걸쳐 끌고 나가게 했다. 경호팀은 사무실 문이 열리자 모두 얼어붙고 말았다.

“뭣들 해요. 당장…….”

앞장서 있던 이 팀장까지 가만히 서 있는 모습에 한 실장은 울컥 화를 내려다 입을 틀어막고 말았다. 사무실 안에 절대로 있지 말아야 하는 사람이 놀란 얼굴로 서 있었다.

“선배들이 왜 여기 있어요?”

이 팀장은 순수하게 놀라서 묻는 연에게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꾸벅 고개를 숙이면서 비켜섰다. 재하는 연의 음성을 듣자마자 숨을 멈췄다.

“강재하 씨.”

책상을 짚고 있던 재하가 억지로 숨을 뱉고 마시며 천천히 돌아섰다. 연은 경호원들에게 입을 막힌 채 끌려 나가다시피 하는 선배들을 돌아보며 걱정스레 물었다.

“무슨 일이에요?”

“보고도 몰라?”

입안의 여린 살을 콱 깨문 재하는 두 팔을 벌린 채 어깨를 으쓱거렸다. 한 실장은 그 사이에 차마 끼어들 수 없었다. 연은 재하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모르겠어요.”

“설명해줘?”

허탈하게 웃으며 책상에 걸터앉은 재하는 눈가를 문지르며 천장을 올려다봤다.

“네가 선배라고 부른 두 놈이 그날 작정하고 칵테일에 약을 타고 약에 취한 널 객실까지 데리고 올라갔더라.”

“강재하 씨.”

“저 자식들 죽이려고 했는데 생각해보니까 나도 마찬가진 거야.”

“그만…….”

“약 취한 너 데려다가 임신시킨 개자식은 나잖아.”

재하는 뜨거워지는 눈시울을 어쩌지 못해 주저앉아 명패에 머리라도 박고 싶었다. 가장 뭇매를 맞아야 할 사람은 자신이었다.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지 않으려고 했던 한 실장은 재하의 상태가 점점 더 불안해지자 다시 연을 불렀다.

“서연 씨. 일단 나랑 같이 나가요.”

“아뇨.”

두 주먹을 쥔 연은 단호하게 한 실장의 제안을 거절했다.

“강재하 씨랑 얘기부터 나눌 거예요.”

함께 나가는 것을 거절한 연의 마음이 걱정되면서도 고마운 한 실장은 염려의 말을 남겼다.

“혹시라도 어디 아프면 바로 얘기해줘요.”

“네.”

한 실장이 밖으로 나가며 사무실 문을 닫았다. 사무실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던 것처럼 적막감만 흘렀다. 연은 재하가 괴롭게 내뱉었던 말들을 떠올리며 후, 하고 숨을 길게 쉬었다. 다행히 배는 한 실장이 걱정할 만큼 아프거나 당기는 느낌은 하나도 없었다.

깜짝 놀라게 해주려고 여기까지 데려다 준 운전기사부터 마주친 모든 직원분들에게 비밀로 해달라고 부탁하며 올라온 거였다. 말도 없이 온 게 화근이었을까 싶지만 그건 분명 아니었다.

“다쳤어요.”

고개를 돌린 채 외면하고 있는 재하에게 다가선 연은 매고 있던 작은 가방에서 손수건을 꺼내 피부가 까진 손가락 마디에 갖다 댔다. 재하가 어깨를 크게 들썩이며 숨을 쉬었다.

“아프겠다.”

파르르 떨리는 손목을 꼭 잡고 놓지 않은 연은 재하와 눈을 마주했다. 연은 살짝 웃었다.

“속상해요?”

정곡을 찔린 재하는 입술을 콱 깨물었다.

“넌 화도 안 나?”

“화를 내서 뭘 해요.”

“억울하지도 않아? 저놈들만 아니었어도 너 나랑 안 엮였어. 아니. 애초에 나 같은 거 만날 일도 없었다고.”

“강재하 씨는 내가 화내고 억울해했으면 좋겠어요? 왜?”

오히려 반문하는 연에게 말문이 막혔다. 연은 그의 손목을 더 꽉 그러쥐었다.

“화를 내도 저 선배들한테 화를 낼 거지만 억울해하지는 않을 거예요.”

그녀의 손이 빨개진 재하의 손등과 손가락 마디를 살살 토닥였다.

“우리 부모님이 그러셨어요. 사람들끼리 만나는 건 다 인연이 있어서라고요. 그 인연이란 건 나쁘게 닿을 수도 있고 좋게 닿을 수도 있으니까…….”

재하는 고개를 떨어뜨리고 따가운 눈에 바짝 힘을 주어 감았다. 연은 재하에게 손을 뻗어 흘러내린 앞머리를 뒤로 넘겨주었다.

“첫 만남보다 이어가는 과정이 더 중요하다고요.”

잘못을 저지른 선배들보다 더 큰 죄책감을 가지고 있는 재하가 가엾게 느껴졌다. 감고 있던 눈을 뜬 재하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숙이며 연의 어깨에 이마를 기댔다.

“왜 하필 너랑 나쁘게 닿은 거야.”

안 좋았던 인연들은 손에 꼽을 수 없을 정도로 많았지만 지금처럼 후회를 곱씹어야 하는 인연은 없었다. 단순히 서로가 술에 취해 일어난 해프닝이 아니었다는 사실이 재하를 괴롭혔다. 연은 그의 뒤통수를 쓸어내며 속닥였다. 재하가 어떤 면에서 힘들어 하고 있는지 모르지 않았다.

“강재하 씨.”

“응.”

“그래도 폭력은 쓰지 마요.”

“때리지는 않았어.”

경호원들에게 밟으라고 지시하고 명패를 집어 던지기는 했지만 그가 직접 때리지 않은 것은 사실이었다. 연은 미소를 그리며 안도했다.

“때리고 싶었겠지만 강재하 씨는 안 그랬으면 좋겠어요.”

“왜?”

“소소 아빠잖아요.”

재하는 끙 앓는 소리를 내며 눈을 감았다. 연의 말대로 좋은 아빠는 사무실에서 사람을 패지도 않고 명패를 던지지도 않을 것이다. 소소도 그런 아빠를 좋아할 것 같지는 않았다.

이마를 뗀 재하는 연과 둥근 배를 번갈아 쳐다봤다. 어제 오늘 연달아 소리 지르고 말았다.

“또 소리 질렀어.”

“그러게요.”

“오늘도 봐줄 거야?”

연과 시선을 맞춘 재하는 눈치를 살피며 말을 천천히 내뱉었다. 연은 싱긋 웃었다.

“안 봐줄 건데?”

눈꼬리가 아래로 축 처진 그는 입술을 삐죽였다. 미안해 죽겠다는 얼굴로 끙끙 대던 재하는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뱉으며 다시 연의 어깨에 이마를 비볐다.

“Entschuldigung.(미안해.)”

“응?”

낯선 발음의 단어에 연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느낌상 독일어인 것은 분명했다.

“뭐라고 한 거예요?”

“병원 가자고.”

“갑자기 웬 병원?”

“스트레스 받았을 거 아냐.”

어째서인지 귀까지 빨개지는 재하를 보며 연은 깨달았다. 사람이 귀여워 보이면 저절로 뽀뽀하고 싶은 기분이 드는구나 하고 말이다.

“강재하 씨.”

“왜?”

“뽀뽀해도 돼요?”

귀에서 오른 열이 그의 뺨과 입술로 천천히 번져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