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47년 영국

베들링튼의 레이디 윌로우는 일생 동안 이 순간을 기다렸다. 꼬맹이 숙녀는 아버지의 손을 꼭 붙들고 제자리걸음을 하듯이 양발을 번갈아 구르면서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마음 한편으로 이러다가 ‘쉬’를 해버리면 어쩌나 걱정하면서.
장장 6년이란 세월을 간절히 바라고 기도를 한 끝에, 자신에게도 엄마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이 생겼다. 윌로우는 슬쩍 아버지의 얼굴을 훔쳐봤다. 언더튜닉(Undertunic, 튜닉 속에 받쳐입는 옷) 위에 허리띠가 달린 진홍색 써코트(Surcoat, 코트 위에 입었던 겉옷. 13～14세기에는 소매 없고 옆트임이 있는 sideless surcoat가 유행. 십자군들이 갑옷 위에 걸쳤던 소매가 없고 십자가가 새겨진 얇은 옷을 상기할 것)를 낙낙하게 걸치고 성 안뜰에 우뚝 버티고 서 있는 아버지는 에드워드 국왕 폐하 못지않게 잘생겨 보였다. 비록 써코트는 낡았고 검집도 닳아서 빛이 바랬을지언정, 조금 전까지 윌로우는 아버지 무릎에 기어올라가서 적황색 수염을 만지작거리고 놀았다. 하지만 몇 초 지나지 않아 레이디 블랜치의 마차를 발견한 보초의 나팔소리가 성에 울려 퍼졌기 때문에 두 사람은 새 식구를 맞으러 뜰로 나왔다.
「아빠?」
마차와 수행기사들이 언덕 위에 나타나기를 기다리면서 윌로우가 입가만 살짝 움직여서 속삭였다.
「응, 우리 공주님?」
고개를 숙이면서 아버지가 대답했다.
「저기, 아빠. 블랜치 아줌마도 우리 엄마만큼 좋아할 거예요?」
「아니. 죽은 네 엄마를 대신할 만한 여자는 없을 게다.」
감미롭지만, 가슴 아픈 열망과 그리움이 절절하게 배인 표정. 갑자기 마음이 불편해진 윌로우는 아버지의 손을 힘껏 쥐었다.
아버지는 마지못해서 윌로우에게 윙크를 했다.
「내가 블랜치처럼 신분이 높은 미망인과 혼인을 하면 국왕 폐하께서 기꺼워하실 게야. 블랜치의 전남편은 전사했단다. 그래서 그녀에게는 작위가 있는 남편이, 내게는 폐하께서 하사하실 지참금이 필요한 게지.」
아버지는 윌로우의 손을 앞뒤로 흔들었다.
「폐하의 은덕을 다시 입는다고 생각해보렴, 윌로우! 얼마나 멋진 일이냐. 이제 우리 공주님 뱃속에서 꼬르륵 소리를 듣지 못하겠구나. 사냥터에서 갓 잡아온 꿩이며 사슴, 맛난 고기가 날마다 저녁 식탁에 올라올 테니 말이다. 다시는 네 엄마의 보석들을 팔지 않아도 되겠지. 두고보렴. 블랜치가 소유한 숲에 있는 나무들만 팔아도 앞으로 몇 년 동안 금화가 쌓이다 못해 돈궤가 넘쳐날 게다.」
윌로우는 애써 신이 나는 척했지만, 블랜치 아줌마네 숲에 자라는 나무들이나 금화가 가득 담긴 돈궤에 대해서는 아무 관심이 없었다. 그저 자신이 엄마를 바라듯이 블랜치 아줌마도 어린 딸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길 바랄 뿐이었다. 새엄마에게 구애하기 위해서 아버지는 근 몇 달간 성을 비웠는데, 다른 연유에서였다면 도저히 견뎌내지 못했으리라.
엄마가 있었으면 하는 열망은 평상시에 숨기는 일이 하나도 없는 아버지에게조차 내보이지 않았다. 아버지의 사랑스러운 딸로서 살아가는 게 더할 나위 없이 만족스러웠지만, 그렇지 않을 때도 가끔, 아주 가끔 있었다. 아버지의 닳아빠진 바지를 기우거나 눈 내리는 겨울날 외투도 입지 않고 밖으로 나간 아버지에게 잔소리를 하면서 꽁꽁 얼어붙은 수염을 뽀뽀로 녹이고, 아버지가 검은 고수머리를 쓰다듬으면서 ‘우리 공주님’이라고 부르면 좋아서 깔깔 웃는, 그런 생활이 만족스러웠다. 말이 좋아서 빈즈 엔 포타주(beans and pottage, 콩으로 만든 진한 야채 수프)지, 콩 건더기가 별로 없는 멀건 수프를 먹으면서도 불만스러워 한 적이 한번도 없었다. 엄마가 유품으로 남기신 성경 필사본에 나오는 재미있는 이야기를 듣다가 아버지 품에서 잠이 들 수만 있다면. 아버지가 내다 팔지 않은 책은 엄마의 유품인 성경 필사본이 전부였다.
하지만 사냥개들과 엉켜서 벽난로 앞에 깔아놓은 짚요에 누워 있노라면, 불현듯 잠이 들 때까지 자장가를 불러줄 엄마가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이 떠오르곤 했다.
윌로우는 아버지의 손을 다시 잡아당겼다.
「블랜치 아줌마가 날 좋아해줄까요?」
「그렇고말고. 우리 귀여운 아가씨. 이 세상에 우리 공주님을 사랑하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니?」
하지만 이번엔 아버지는 윌로우를 내려다보지 않았다. 대신 아플 정도로 힘껏 윌로우의 손을 쥐었다.
윌로우는 의혹에 시달리면서 모직 커틀(Kirtle, 13세기 이후, 여자들이 입던 드레스로 수수한 느낌을 준다)의 치맛자락을 매만졌다. 촛불을 벗삼아, 돌아가신 엄마의 가운을 손질해서 직접 커틀을 만드느라 눈이 벌겋게 충혈되었고 손가락은 어찌나 혹사를 당했는지 경련이 일어나면서 갈라지고 피가 났다.
윌로우는 새엄마에게 바느질 솜씨를 뽐내볼 요량으로, 사각형으로 파인 커틀의 목둘레에 장미넝쿨을 수놓기까지 했다. 눈가루 냄새가 섞인 매서운 북풍을 맞고 덜덜 떨지언정, 기껏 손재주를 부려서 만들어놓은 작품을 빛 바랜 코트 밑에 가려지게 할 순 없다.
갑자기 밀려드는 자신감에 힘을 얻은 윌로우는 턱을 치켜 올렸다. 아빠 말이 맞아. 이 세상에 날 사랑하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어?
하지만 깃발을 든 열 두 기사들의 호위를 받으며 눈처럼 하얀 마차가 도개교를 지나서 성안으로 들어오자, 공포심이 윌로우의 가슴을 짓눌렀다. 나름대로 열심히 준비하긴 했지만, 새엄마가 맘에 안 들어 하시면 어떻게 하지? 새엄마가 날 부족한 아이라고 생각하시면 어떻게 해?
얼음판 위를 미끄러지듯 소리 없이 달려오던 마차가 멈춰 섰다. 자수가 놓인 장밋빛 휘장에 포옥 감싸인 이륜 마차, 금박을 입힌 크림색 바퀴. 눈앞에 펼쳐진 화려한 정경에 압도된 윌로우는 숨을 멈췄다. 눈처럼 하얀 여섯 필의 백마들이 발을 구르는가 싶더니 머리를 쳐들고 곱게 땋아놓은 갈기를 뽐냈다. 고삐에 달린 작은 방울들이 경쾌한 음색을 내면서 딸랑거린다.
아버지가 몸을 숙이고 귀엣말을 했다.
「블랜치 아줌마가 널 위해서 ‘깜짝 선물’을 준비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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