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4년, 잉글랜드

월터 드 로우튼은 국왕 알현실의 바깥에 마련되어 있는 대기실에 앉아 차례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일단, 알현 요청이 받아들여졌다는 사실에 희망을 갖고 있었지만,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오늘은 과연 국왕의 얼굴을 볼 수 있을지 마음이 다급해졌다.
월터와 마찬가지로 국왕에게 뭔가를 바라는 귀족들과 영주들도 같은 방에서, 제각기 희망을 안은 채 기다리고 있었다. 대기실에 앉아 있는 사람들 중에서 마음속의 조급함을 얼굴에 드러내지 않고 있는 사람은 월터뿐이었다. 하지만 월터도 다른 사람들 못지않게 조급하고 불안했다. 그저, 다른 사람들보다 조금 더 그 속내를 잘 숨기고 있을 뿐이었다.
불안하고 걱정스러운 일은 사실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존 플랜태저넷(John Plantagenet, 존 왕의 이름)은 모든 기독교 왕국의 왕들 중에서 가장 혐오스럽고 사기와 권모술수에만 능란할 뿐, 신뢰 같은 것은 눈곱만큼도 기대할 수 없는 인간이었다. 자기 적들에게 본때를 보여주기 위해서라면 인질로 잡고 있던 무고하고 순진한 어린아이의 목매다는 일마저도 주저함이 없었다. 허나 그런 무자비한 행동은 결코 국왕이 의도한 결과를 가져다주지 못했다. 오히려 극악무도한 행동을 목격한 봉신과 영주들은 공포심과 혐오감으로 그에게 점점 더 등을 돌리게 되었다.
존은 국왕의 자리에 오르기 전에 자신의 친형인 사자왕 리처드를 제거하고 왕좌를 차지하려고 두 번이나 음모를 꾸민 일이 있었다. 당연히 극형에 처해질 일이었지만, 모후(母后)가 강력히 저지한 덕에 두 번 다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리처드 왕이 눈을 감자마자 그의 적장자였던 어린 조카 아서를 죽이고, 아서의 누이 엘레노어는 감옥에 보내버렸다. 당연히 왕위는 존의 차지가 되었다. 그리고 리처드의 딸 엘레노어는 생애의 절반을 감옥에서 보내야 했다.
오래 전에는 많은 사람들이 헨리 왕의 네 아들 중 막내였던 존을 불쌍하게 생각하기도 했었다. 헨리 왕의 영토는 대부분 세 형들에게 분할되고 존의 몫은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존에게는 ‘결지왕 존’이라는 별명이 늘 따라다녔다. 그러나 왕위에 오른 후의 존은 동정할 것도, 불쌍할 것도 없는 인간이었다. 교회를 상대로 전쟁을 일으켜서 나라 전체를 파문 당하게 한 국왕에게 동정할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교회는 잉글랜드에 대한 파문을 최근에야 거두어들였다. 그런 국왕에 대한 백성들의 감정은 혐오스러움과 두려움뿐이었다.
힐끗힐끗 곁눈질로 살펴보는 사람들에게 무표정으로 일관하며 속내를 가까스로 감추고는 있었지만, 월터 역시 그간 국왕의 악행을 생각할 때마다 온몸이 떨리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벌써 천 번도 넘게 생각해보았다. 과연 이것이 해볼 만한 가치가 있는 시도인가? 만약 계획이 빗나간다면?
월터로서는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앞으로도 얼마든지 국왕의 관심권 밖에서 조용히, 안전하게 살아갈 수도 있었다. 그는 국왕의 측근에 자주 불려올 이유조차 가지지 못한, 귀족 중에서는 미천한 축에 속하는 사람이었다. 그 일만 아니었다면…… 그랬다면 지금쯤은 사정이 달라졌을 수도 있었다.
오래 전에 한 명망 있는 귀족 가문의 유일한 상속녀였던 아름다운 여인의 마음을 거의 사로잡았던 일이 있었다. 그러나 그 여인과의 결혼으로 그의 차지가 될 뻔했던 더 높은 작위는, 여인과 함께 다른 사내의 것이 되어버렸다. 그 여인, 라이드셔 백작의 딸 앤은 월터의 아내가 되었어야 했다. 그랬다면 막대한 부와 거대한 영지, 자연히 그에 수반하는 권력은 그의 차지가 되었을 터였다. 그러나 레이디 앤은 셔포드 백작 가이 드 토르프의 품에 안겨버렸다. 셔포드 백작의 재산은 결혼과 함께 두 배로 불어났고, 그렇지 않아도 잉글랜드의 막강한 귀족 문벌이었던 토르프 가문은 맞상대할 만한 가문이 없을 정도로 큰 힘을 가지게 되었다.
반면 월터가 선택한 신부는 어떤 측면에서 보아도 잘못한 선택이었음이 시간이 지날수록 분명해졌다. 결국 월터에게는 상처에 소금만 뿌린 격이었다. 신부가 지참금으로 가져온 토지는 결혼 당시로서는 그럭저럭 만족할 만한 수준의 것이었으나, 불행히도 프랑스의 라 마르셰에 있는 땅이었기 때문에 국왕이 프랑스와의 전쟁에서 패해 그 지방에 대한 통치권을 잃는 바람에 하루아침에 남의 것이 되고 말았다. 만약 프랑스 국왕에게 충성을 맹세하기만 했다면 월터는 그 땅에 대한 소유권을 잃지 않을 수도 있었다. 대신에 잉글랜드에 가지고 있던 모든 것을 버려야 했겠지만. 잉글랜드에 둔 재산은 프랑스에 있는 것보다 훨씬 덩치가 컸으니, 그럴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게다가 월터의 아내는 딸만 하나 낳았을 뿐이었다. 써먹을 데라고는 단 한 군데도 없는 여편네였다. 그러나 이제 열 두 살이 되어 결혼적령기에 이른 딸, 클레어는 써먹을 데가 한 군데 있었다.
오늘 월터가 국왕을 알현하러온 데에는 두 가지 목적이 있었다. 앤으로부터 청혼을 무시당했던 해묵은 원한에 대한 보복, 그리고 클레어를 셔포드 백작의 유일한 적자이자 상속자인 아들과 결혼시킴으로써 앤이 월터의 눈앞에서 빼돌린 재산에 셔포드의 재산까지 이자로 덧붙여 되찾겠다는 심산이었다.
월터는 자신의 계획을 가슴 뿌듯하게 생각했고, 시기마저 절묘하게 맞아떨어지는 것 같았다. 국왕이 요즈음 들어 오래 전에 잃어버렸던 영지인 앙주 지방을 되찾을 생각에 골몰하고 있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져 있었다. 때맞게 월터가 궁리하고 있는 계획을 국왕 앞에 내놓을 수만 있다면, 굶주린 말의 면상에 대고 당근을 대롱대롱 흔드는 것과 같을 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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