꼬마 아가씨 캐슬린 루니는 감자 두 개와 순무 반토막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넌더리를 쳤다. 그리고 후 한숨을 쉬며 감자와 순무의 썩은 부분을 잘라 내고는, 잘게 썰어 시꺼먼 냄비에 담고, 당장이라도 꺼질 듯이 깜박거리는 난롯불에 걱정스런 눈길을 던졌다. 집시인, 키티(캐슬린의 애칭)의 할아버지 ‘스와디’는 난로 앞에 앉아 있었다. 귀에 매달린 금귀고리가 사그라지는 불빛에 반사되어 반짝거렸다. 갑자기 초라한 오두막 문이 활짝 열리며 바람과 비가 사정없이 몰아쳤다.
“휴, 다행이야, 테리. 불이 막 꺼지려던 참이거든.”
키티는 의자에서 펄쩍 뛰어내려, 동생 테리가 구해 온 땔감을 불 속에 집어넣었다.
“어머, 테리, 너 또 흠뻑 젖었구나.”
“응. 이 지긋지긋한 비는 언제쯤 멈출까?”
“돼지가 하늘을 날아다니는 날이 오면! 할아버지, 테리 옷 좀 말리게 난로 앞으로 상자 좀 옮겨 주세요. 속옷까지 흠뻑 젖었나 봐요.”
“누나, 내 부츠가 오래 버틸 성싶지 않아. 밑창에 구멍이 뚫려서 발에 물집이 생겼어.”
“내가 기워 줄 테니 걱정 말거라. 부츠를 깁는 데, 이 할아빌 따라올 사람이 없잖니.”
“뭘 가지고 기우실 건데요?”
할아버지의 허풍에 키티가 눈을 찡긋하며 대꾸했다.
“누나는 맨발로 다니는데 난 부츠를 신고도 불평만 늘어놓았네. 나, 괜찮아.”
테리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두 손을 내저었다.
“난 맨발로 다니는 데 익숙해 있잖아. 게다가 지금은 여름이고.”
키티의 장난기 어린 눈이 반짝거렸다.
“여름이라고 언제 해가 나온 적이 있어? 있으면 말해 봐. 올해 농작물도 다 망쳤잖아. 땅이 모두 진흙탕이 돼 버려서, 풀이란 풀은 모두 썩었잖아.”
비통해하는 테리의 어조는 열한 살짜리 아이라기보다는 세상 풍파에 찌든 어른 같았다.
“그래도 비가 온 덕에 리페이 강까지 물길으러 안 가도 되잖아. 하긴 물을 떠다 요리할 음식도 없지만. 오늘 저녁으로는 묽은 수프가 조금 있지만, 내일은 어찌될지 모르겠어.”
키티가 낙담한 표정으로 냄비를 불 위에 올려놓았다.
“아가, 사람 먹을 양식은 저절로 생기게 마련이니 예쁜 얼굴 찌푸리지 말아라.”
할아버지가 키티를 위로했다. 키티는 기가 막힌 듯 눈동자를 굴리고는, 동생에게 의미심장한 시선을 던졌다.
“참, 누나, 성에 마차가 대기해 있어.”
코를 소매에 쓱 문지르며 건네는 테리의 말에 키티가 머리를 번쩍 들었다.
“더블린에 가려나 본데, 무슨 일이 생겼나?”
“주인이 오나 보지 뭐.”
테리가 어깨를 으쓱하며 한마디 거들었다.
“잠깐 기다려. 금방 다녀올게.”
키티는 문 뒤에 걸린 숄로 머리를 감싸더니, 맨발이라는 사실도 잊은 채 억수같이 쏟아지는 빗속으로 뛰어나갔다.
키티는 더블린에서 50킬로미터 남짓 떨어진, 12만 평이나 되는 오렐리 가문의 토지에서 어릴 적부터 줄곧 살아왔다. 샤롤레(프랑스 원산의 흰 소)와 미끈한 순종 말 떼를 소유하고 있는 오렐리 가문의 저택은 ‘언덕 위의 성’이라 불렸다. 영국 랭커셔에서 공장을 여럿 경영하는 조나단 오렐리는 여름 한 철을 보내려고 아일랜드의 이 저택을 정기적으로 방문했다. ‘언덕 위의 성’ 하인들은 일 년 열두 달 성안에서 숙식을 해결했다. 그리고 농작물을 재배하여 자활 체제를 유지하려고 발버둥치는 작인들과 가축을 돌보는 일꾼들이 농장 오두막에서 북적대며 지냈다. 키티네 가족은 오렐리가(家)의 하인은 아니었지만, 주인이 자기 토지에 정착한 집시들을 쫓아내지 않은 덕분에 이곳에서 근근히 목숨을 부지하고 있었다.
키티의 어머니는 테리를 낳다가 세상을 떠났다. 아내를 잃은 슬픔을 떨쳐 버리지 못한 아버지는 아이들의 생계를 할아버지에게 떠맡기고 어느 날 밤 정처 없이 떠나 버렸다. 그날 밤 할아버지는 리페이 강 가에 천막을 쳤고, 그 후 10년 동안 루니 가족은 그곳에 정착해 살고 있었다.
억수같이 퍼붓는 장대비를 맞으며, 키티는 하루 종일이라도 기다릴 각오로 마구간 처마에 쪼그리고 앉아 꼼짝도 하지 않았다. 마차 차고 문들은 모두 열려 있었고, 마차는 바깥 방향으로 세워져 있었다. 비가 내리고 있어서, 하인들은 마구간 안에서 말에 연장을 채우고 있었다. 키티는 인내심 있게 기다렸다. 말 두 마리를 끌어내 마차에 묶은 목동이 두 마리를 더 끌고 오려고 마구간으로 들어가며 마부에게 말을 건넸다.
“말먹이를 가져옴세.”
“나도 담요를 가져오는 게 낫겠네. 팀, 자네도 나리께서 말을 얼마나 아끼시는지 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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