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할아버지가 불지옥에나 떨어지길 바라 드리죠.”
세 들어 사는 아파트 한쪽 벽에 놓아둔 낡아 빠진 책상에 앉아 있던 에버리는 책상을 확 밀쳤다. 처음부터 있었던 부자연스러운 가구 몇 개와 다른 사람들이 버리고 간 물건들이 그의 시야에 하나씩 들어왔다. 그 모든 걸 참을 수 있었던 건, 언젠가 자기 소유의 집이 생길 것이라는 사실 하나 때문이었는데. 언젠가 밀하우스를 갖게 되리라는…….
15년 전, 유행성 감기로 부모님을 한꺼번에 잃었을 때, 그는 후견인인 호레이셔 할아버지를 만나기 위해 데번주에 도착했다. 일곱 살 때였다.
그곳에서 사이프러스 나무가 서 있던 길을 달렸던 일이 떠올랐다. 그는 머리를 아예 창밖에 고정시키고 여름이라 더욱 푸른 풀빛 침대 위에 호박(琥珀)처럼 빛나는 장원(莊園)의 영주저택인 돌로 지은 ‘밀하우스’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곧 열렬한 사랑에 빠졌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홀린 듯이 쳐다보는 에버리가 재미있기도 하고 또 과도한 씨근거림이 너무 낯설어서, 호레이셔는 별 생각 없이 덜컥 약속을 해버렸다. 그에게는 그렇게 집 한 채를 턱턱 내줄 수 있는 여유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밀하우스는 그에게 큰 의미가 없었다. 그저 아버지가 구입해 둔 농장, 토지와 함께 그가 소유한 여러 집들 중 하나에 불과했다.
그후로 가끔씩 에버리의 방문이 허락되면서, 두 번의 멋진 크리스마스와 가을날의 잊지 못할 몇 주간의 방문 등으로 인해 밀하우스는 그의 마음속에 깊이 각인 되었다. 그리고 해로우 요양소에서 보냈던 기나긴 요양기간 동안 밀하우스로 걸어 들어가는 상상만으로도 고통을 잊을 수 있었다.
그는 일평생 오직 하나만을 기다려왔다. 그래서 행여 잘못되기라도 할까 봐 속에서 끓어오르는 욕정을 철저히 감춘 채 감탄할 정도로 헌신적인 구혼자처럼 행세했다. 그런데 지금, 애써 노력한 무관심이 그를 파멸로 이끈 것이다. 꿈에 그리던 집이 고작 열아홉 살 먹은 여성 참정권론자에게 넘어가려 하다니!
봉투를 움켜쥔 손가락에 힘이 들어가더니 입술이 비틀리며 에버리의 얼굴에 쓴웃음이 번졌다. 오래전에 그는 신체적 허약함을 딛고 살아남기 위해 남들보다 강인한 정신력을 발휘했었다. 때문에 그는 남자처럼, 그리고 그가 지향하는 신사처럼 멋지게 해낼 수 있었다. 그리고 어떤 난관이 부딪쳐 오더라도, 그게 신체적인 문제든 정신적인 문제든, 운명에 기인한 것이든 후견인 때문이든, 아니면 어떤 다른 녀석들 때문이든 그는 점잖게 받아들였고 속을 뒤집어 놓는 말도 다 참아 냈다. 그로 인해 다른 아이들은 에버리를 대단하고 경이롭게 생각하게 되었다.
그는 가끔 학교 선생님을 붙들고 할아버지에게 보내는 편지에 자신의 체력이 떨어진다는 얘기를 하지 말아 달라고 부탁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그런 것들도 결국 호레이셔를 더욱 넌더리나게 했을 뿐이라는 건 능히 짐작하고도 남았다. 결국 할아버지의 편지를 보자면, 그에게 지금껏 밀하우스에 대한 에버리의 열렬한 바람은 전혀 관심의 대상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가 가진 것이라고는 신사로서의 위상과 집을 갖는다는 희망뿐이었다. 그런데 지금, 그 마음은 모래 위에 지은 성에 불과했고, 그건 다 그…… 릴리안 베드에게로 가 버렸다.
그는 어쩐지 그 이름이 낯설지 않았다. 그리고 언젠가 신문에서 그녀의 모습이 나온 어느 화가의 전시를 본 기억이 났다. 키가 크고 검은 눈썹에 집시처럼 생겼던 여자, 여성 참정권론자의 연인이라던.
이 조그만 여자가 대체 어떻게 엉겨 붙었기에 호레이셔 할아버지의 환심을 샀을까? 그리고 그 여자는 왜 그런 정신 나간 제안까지 받아들인 거지? 할아버지의 말이 맞을 것이다. 여자가 어떻게 밀하우스 같은 큰 집을 5년 동안이나 훌륭하게 운영할 수 있으랴. 어림도 없는 일이다.
5년. 에버리는 앉아 있던 회전의자 머리에 고개를 뉘였다. 그러고는 천천히 한 바퀴 돌며 생각을 집중해 보았다. 하지만 아무리 침착해지려고 애써도 속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젠장! 5년이라니.
군말 없이 받아들이자니 속이 뒤틀리는 것 같았다. 그는 편지를 조각조각 찢었다. 자존심을 부리기에는 손해가 너무 컸지만, 그래도 이런 경우 내세울 건 자존심뿐이었다. 그는 야윈 손을 펼쳐 종이 조각이 바닥에 펄럭이며 떨어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리고 그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결정했다.

가장 안쪽, 조용한 곳에 자리한 사무 변호사 길크리스트와 구드의 사무실로 통하는 어두운 호두나무 빛깔 문이 쾅 하고 열리더니 안에서 릴리안 베드가 튀어나왔다. 손에는 봉투가 쥐어져 있었다. 손바닥에 찬 땀이 손가락을 타고 두툼한 고급 피지로 흘러내렸다.
그녀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따라 나온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사랑스럽게 생긴 과부도, 바짝 마른 어린 소년도, 아름다운 중년의 딸도 모두 사무실 안에 있었다. 아마도 변호사 테이블에 둘러앉아 아직도 입을 딱 벌리고 있을 테지. 이미 호레이셔 앨거넌 소르네의 유언에 충격을 받았을 단 한 사람만이 그 자리에 빠져 있을 뿐이었다. 에버리 소르네, 의심의 여지가 없었던 밀하우스의 상속자. 그렇다면 그녀는 이런 이상한 유언을 받아들여야 하는 걸까, 그녀가…… 후견인? 그리고 관리를?
릴리안은 생각할수록 다리가 후들거렸다.
다행히 열려진 창문 아래로 작은 벤치 하나가 보였기에 겨우 다가가 딱딱한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남루한 옥탑방의 집세를 어디서 마련해야 하나 궁리했었는데, 날도 저물지 않아 밀하우스가 생긴 것이다.
게다가 어른이 다 된 남자의 후견인까지 되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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