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전자책으로 출간되었던 작품의 종이책 출간본입니다.


<느낌>

“이게 뭔지 알아요?”
허은, 이라고 쓰는 걸 봤지만 레도는 부러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은 은이 했다.
“세상에 단 하나뿐인 글씨예요.”
은은 다시 손가락을 움직였다. 비, 꽃, 바람, 호수, 하늘, 눈물. 물 위에서 은의 손끝은 유연하고 아름다웠다. 뿐만 아니라 각 글자마다 글씨체가 조금씩 달랐다. 부드럽게 흐려지거나 동그랗게 말려들어가거나 옆으로 넓게 퍼지거나 가랑가랑 위태롭게 흔들리거나, 은이 그려내는 글자들은 제각기 다른 느낌으로 새로 태어났다.
“제법인데.”
은이 뽀스스 웃었다.
“이런 건 어디서 배운 거야?”
“배운 적 없어요. 그냥, 그냥 내가 한 거예요. 재미있으니까.”
“흠.”
“잘 봐요. 이번엔 뭐라고 쓰는지.”
은의 손끝이 물 위에다 천천히 글자를 새겨나갔다.
보, 고, 싶, 다.
아까와는 달리 연필로 꼭꼭 눌러 쓰듯 단정하고 곧은 필치였다. 심장으로 찌릿 통증이 느껴졌다. 레도는 입을 꾹 다문 채 은이 그려낸 글자들을 기억했다. 손이 지나간 뒤면 금세 지워져 버리는데도, 글씨들은 하나씩 하나씩 가슴 속에 섬세히 각인되었다.
“사실은 아까부터 내내 연습했는데, 잘 안 돼요.”
“뭐가.”
“이름요.”
“누구 이름.”
“이……레도.”
가슴 안에 예리한 아픔이 찾아왔다. 그러나 레도는 무심히 물었다.
“왜.”
“잘, 모르겠어요. 어떤 느낌인지.”
“느낌?”
“가슴에 담기는 느낌 같은 거요. 그게 분명해야 거기 어울리는 글씨체로 쓸 수가 있는데. 근데 레도 오빤 잘 모르겠어요. 어떤 느낌인지, 어떤……사람인지.”
마음의 결들이 올올이 흔들린다. 흔들리는 마음을 꽁꽁 묶으며 레도는 차갑게 말했다.
“알려고 하지 마.”
은이 레도를 돌아보았다. 비에 젖은 듯 차분하고 촉촉한 눈동자가 안쓰럽다.
“오늘, 뉴욕으로 가.”
“알아요.”
“한 달쯤 있게 될 거야.”
“그것도 알아요.”
“써 봐.”
“…….”
“내 이름.”
은의 손이 물 위에 닿았다. 움직였다.
이, 레, 도.
획 하나 하나가 날렵하면서도 애틋하고, 매력적인 여운을 지녔다. 과연 세상에 단 하나뿐인 글씨체다. 종이 위에 써 달라 말하지 않은 것을 안타까이 후회하며, 은이 그려낸 자신의 이름을 가슴 속에 담은 채로 레도는 일어나 섰다. 은도 일어나 섰다.
레도는 젖은 은의 손을 가만 내려다보았다. 은은 눈을 살풋 내려 깔고서 레도의 시선을 견디고 있었다. 레도는 천천히 은에게로 손을 뻗었다. 손 안에 은의 작은 손이 쏙 들어와 안겼다.
데려가 버릴까. 어디 아무도 모르는 데로 데려다 놓아버릴까. 지금 당장.
욕망에 발목이 잡힐까 두려워진 레도는 던지듯 은의 손을 놓고 성큼성큼 발을 옮겼다. 빗소리가 차츰 커졌다. 마치 은의 울음소리 같아서, 레도는 간절히 두 귀를 막고 싶었다.

봄을 좋아한다.
쓰는 즐거움으로 행복해지길 바라며
다양한 빛깔의 삶과 사랑과 사람을 그리고 싶다.

* 종이책 & 전자책 출간작
푸른 속눈썹. 오르골. 햇빛 아래 그가 있다.
계절사랑 시리즈 / 겨울사랑(2권). 여름사랑. 봄사랑. 가을사랑
연지. 올 오아 낫씽(2권). 풀잎연가. 이끌림. 느낌. 귀엣말.
열대의 시간. 타임. 포옹. 당신의 숲. 가장 투명한 빨강.
파문이 나를 새길 때. 곰곰, 하는 중입니까?

* 전자책 출간작
동그라미. 눈사람에게. 약속. 이안류.

* 장편동화 <엄지>와 동화집 <나의 철부지 아빠(공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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