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중에서-

자고로 유산이란, 출산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몸조리가 중요하다 했다. 때문에 사안이 사안임에도 불구하고 서휴의 꿈쩍없는 태도로 인해 이곳 장원에 머무른 지 어느덧 아흐레가 훌쩍 넘어가고 있었다.
“휴, 이제 그만 움직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예상치 못하게 오래 머무르는 상황이 불편하기만 한 수려였다.
“아직은 무리요. 찬기운도 아니 되고, 원행(遠行)은 더더구나 무리요.”
“어찌하여 무리란 말입니까? 이제 그 연유를 알려주실 때가 되지 않았습니까? 대체 란마의 걸음마저 막으시고 뭘 숨기시는 것입니까?”
그녀의 물음에 답은 하지 아니하고, 한동안 수려의 은안을 지그시 바라보기만 하던 서휴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허면, 나 또한 묻겠소. 본인의 몸 상태에 대해 그대는 얼마나 알고 있는 것이오?”
예상은 했지만 생각보다 몸 상태가 좋지 못 한 듯 했다. 그가 먼저 저리 치고 나오는 것을 보면. 그리하여 수려는 그저 복잡 미묘한 시선으로 서휴의 고요한 흑안을 응시할 뿐이었다. 그리고 잠시 후.
“이번의 경우, 단순 경도가 아님은 압니다.”
그녀의 답이 썩 만족스럽지 못했던지, 서휴의 검미가 살짝 꿈틀거리다 제자리를 찾았다.
“이번 경우만을 묻는 게 아님을 그대도 알고 있지 않소?”
하긴, 이렇게 쉽게 넘어갈 그가 아니었다. 그녀의 상태를 거의 파악한 상황에서 확인을 위한 절차에 불과한 것이리라.
“제가 무인임을 잊으셨습니까? 의원은 아니나, 제 상태를 모를 정도로 아둔하진 않습니다.”
그동안 란마의 탕제와 환제 그리고 그녀 스스로 기를 운용하여 장기를 보하고 있긴 했지만, 장기가 온전치 못함을 그녀도 잘 알고 있었다. 기를 운용하여 그동안 티내지 않고 잘 버텨내고 있긴 했지만, 언제 무너져도 하나 이상할 것이 없는 몸이 바로 그녀의 몸이었다. 그런 몸인지라, 경도가 아닌 상황에서의 하혈이란 포궁(胞宮) 어딘가에 문제가 생겼음을 의미하리라. 회임할 수 없음을 그 누구보다 잘 아는 바이니, 결코 아이와 관련된 것은 아닐 터였다. 헌데…….
“유산을 하였소.”
갑작스레 서휴 그의 입에서 나온 예상치 못한 말에, 수려는 생각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유산……이라니요? 그럴 리…….”
순간적인 충격으로 하지 말아야 할 말이 저도 모르게 새어나올 뻔하였다. 깨닫자마자 화급히 입을 다물어 막기는 하였으나, 그게 아니어도 그는 어느 정도 눈치 챈 상태인 듯 했다.
그건 그렇고, 아이를 가질 수 없을 것이라 하였다.
‘그런데 유산이라니……. 그럼, 회임을 했었단 말이 아닌가?’
생각은 더 이상 이어지지 못하였다.
“출산 못지않게 위험한 게 유산이오. 때문에 최소 한 달은 찬바람도 아니 되고, 석 달 정도는 충분히 몸조리를 하여야 하오.”
잠깐, 석 달이라니? 현재 당면한 사안이 얼마나 급박하고 중한 상황인데, 석 달이 웬 말인가? 아니 될 말이었다.
“석 달이라니요? 지금 당면한 사안이 어떠한 것인지 잘 아시지 않습니까? 석 달은 당치도 않습니다. 한 달이면 충분합니다. 그 이상은 저도 양보할 수 없습니다.”
한 달이면 충분할 터였다. 무인으로서 기를 운용함에 좀 더 세심히 신경을 쓴다면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상황이었다. 헌데, 그러한 그녀의 생각이 가당치도 않다는 듯, 평소와 사뭇 다른 엄한 음성이 그로부터 흘러나왔다.
“지금, 한 달이라 하였소? 그대 몸 상태가 어떠한지나 알고 하는 말이오? 현재로선 석 달이 아니라, 한 해 꼬박 몸조리 하여도 부족할 지경이오!”
마치 어린 자녀를 꾸짖는 아비처럼 서휴의 표정은 엄하기 이를 데 없었다.
“허면, 전 이곳에 머무를 터이니 당신께선 서한이든 가란이든 가셔야 할 곳으로 가셔서 일을 처리하십시오.”
“아니 될 말!”
표정만큼이나 엄한 음성이 단호함을 드러냈다. 그러한 단호함과 맞서기 위함일까? 그 어느 때보다 차분한 음성이 그녀로부터 흘러나왔다.
“아니 되다니요? 당신은 제국의 황제십니다.”
일국의 지배자인 그가 소소한 여인 하나로 인해 발이 묶여서는 아니 되었다. 그러한 그녀의 생각을 읽어냈음일까? 또 다시 서휴의 검미가 꿈틀거렸다.
“내가 그대를 모를까? 그대 옆에 내가 있지 아니하면 그대는 한 달도 채우지 못하고 가란으로 향할 것이오. 그대가 마음만 먹는다면 그대를 막을 자, 이곳에 아무도 없소. 나 이외에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어차피 그녀의 몸은 결코 오래 버티지 못할 것이었다. 그럴 바에야 그녀가 해야 할 일을 마무리는 지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로 인해 두 대륙 간 드러나지 않았던 불안한 혼란이 잠재워지고 당대의 두 제국이 동등하게 굳건한 자리를 유지하게 된다면야, 그의 가슴에 생채기를 내는 한이 있더라도 그리 하여야 하는 것이었다. 훗날의 그를 위하여.
더욱이, 그녀의 몸 상태를 그가 알았다 하여 모든 일이 해결되는 게 결코 아니었다. 여전히 불안정한 그녀의 존재 자체는 제국 간 전쟁의 빌미로 쓰이기에 그 효용성이 아직 유효하였다. 독에 중독된 것도 모자라, 후계자를 볼 수 없는 그녀다. 그러한 사실을 숨기고 황녀를 서한의 황후로 보낸 가란의 행태가 서한의 대소신료들에게 알려지게 된다면, 그들은 결코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특히나 현 상황에서 그러한 사실이 드러나게 된다면, 서한을 능멸한 것이나 다름없는 가란의 행태에 그들은 분노하게 될 터였다. 아무리 영명한 황후라 하나, 후계자를 생산하는 것이 황후의 첫 번째 의무이니 만큼……. 만약, 일이 잘 무마되어 제국 간 전쟁으로까지 치닫지 않게 된다 하더라도 서한 대소신료와 백성들의 가란에 대한 불신의 골은 결코 회복되지 못할 수도 있었다.
더 나아가 그녀를 폐서인시키거나 후궁을 들이라 주청하는 대소신료들과, 성정 상 후궁을 들일 리 없는 서휴가 대립할 것은 자명한 사실이었다. 그리고 이로 인해 서휴와 신료들 간에도 알게 모르게 골이 생기게 될 것이고, 아무리 서휴라 할지라도 쉽지 않은 상황에 놓이게 될 것이 자명했다.
어차피 해독되지도, 그에게 후계자를 안겨주지도 못할 몸이었다.
‘내가 사라지면 자연스레 새로운 황후가 이 자리를 대신하게 될 터……. 그래, 그러면 되겠지.’
떠날 자가 남겨질 이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은 많지 않은 법이었다. 하여, 그 정도면 충분하다 스스로를 위안하는 수려였다.
조용히 눈을 감고 잠시 동안 그리 생각을 정리하고 있는 사이, 또 다시 그의 단호한 음성이 그녀의 귓가를 파고들었다.
“찬바람은 현재 그대 몸에 독과 같소. 더더구나 장거리 이동도 아니 되오. 현 상황은 이곳에서도 충분히 처리할 수 있으니, 딴 생각 하지 말고 푹 쉬도록 하시오. 그대가 아니라 나를 위해서 꼭 그리 하시오.”
그의 말처럼 아무 생각 없이 쉴 여인이 결코 아님을 알지만, 속이고 말하지 않는다 하여 수긍하며 얌전히 있을 그녀가 아님도 알기에 서휴는 유산 사실을 밝힘과 동시에 평소와 달리 강경한 태도를 취하였다.
지금이야 저리 담담한 척 별 내색을 하지 않는 그녀이나, 잠시라도 곁이 비워지고 홀로 있는 시간이 주어지게 된다면 조용히 무너질 여인이 바로 그녀임을 모르지 않았다. 그러기에, 다른 곳으로 신경을 분산시킬 필요가 있어 아이 이야기를 더 이상 하지 않고 그녀의 몸 상태에 중점을 두고 그리 강경한 태도를 취한 것이었다.
게다가, 지금껏 눈물 한 자락 흘린 적이 없다던 사실이 유독 그의 가슴을 헤집어 놓고 있었다. 슬픔을 가슴에 품고 아무도 없는 곳에서 가슴을 쥐어짜며 피눈물을 흘릴 것이 분명한 여인이 바로 그녀 수려였다. 미물의 상처 하나에도 가슴 아파하는 그녀가, 아이가 죽었단 사실을 어찌 가벼이 여기겠는가? 내색은 하지 않더라도 자책으로 인해 그녀의 가슴은 너덜너덜해질 게 분명했다.
때문에 그러한 수려 곁에서 한시도 떠나지 아니하며 위안을 해주고 싶은 그의 마음이야 지극했지만, 그녀 말대로 산재한 일이 여럿이고 화급을 요하는 일 또한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휴식을 취해야 할 그녀 곁에서 여러 가지 사안을 들고 수하들과 논의하거나 명을 내릴 수는 없었다. 그리 한다면 그녀는 더욱 자리에서 일어나려 기를 쓸 터이니 말이다.
그처럼 상대를 염려하는 지극한 마음을 저변에 감추고 서로의 앞날을 위해 다르게 표현하는 이 두 사람의 상황은, 어찌 보면 동상이몽(同床異夢)의 순간이라 할 수 있었다.
그리 서로 다른 생각에 빠져있는 사이, 혼현국 국왕이 보낸 전령이 도착하여 잠시 자리를 비워야 할 상황이 도래하였다. 하여, 그의 뒤를 따르는 무윤을 제하고 이곳에 남을 무율과 하명에게 암중으로 그녀를 잘 살피고 곁을 지키라는 명을 내리고 떨어지지 않은 발걸음을 겨우 떼어내었다.
그렇게 그가 침소를 벗어나자마자, 허공을 응시하던 그녀의 눈이 조용히 감겼다. 그의 앞이었기에 감정을 숨기기 위해 무던히도 애를 썼지만, 지금은 그럴 필요가 없었다.
어쩐지 여러 날이 흘렀는데도 몸의 한기가 가시질 않았더랬다. 제 몸 상태가 무너진 지 하루 이틀 일이 아닌지라 또 어디 한군데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무너져 내렸나 보다, 그리 여기고 말았었다.
‘헌데, 유산이었다니…….’
문득, 혼몽 중에 보았던 아이의 손이 떠올랐다.
'미안하다, 아가. 혼몽 중에 손만 보이던 아이가 바로 너였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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