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작품 소개

“그럼 우리 중에 누가 더 간절한 걸까요?”

‘드릴러’ 윤서현. 최고의 에이전트인 그녀가 손만 대면 맨땅에서도 석유가 터진다는데, 실상 그녀의 위치는 회사에서건 집에서건 불안불안하다.

그러던 와중, 서현이 키우던 축구선수의 스캔들로 인해 초유의 사태가 발생한다! 살아남기 위해선 초대박 스타를 데려와야 하고 그런 그녀 앞에 나타난 구세주는 세계적인 골프 황태자, 서희원.

10년 전 그 사건 후 첫 만남에 서현은 주저하고, 희원은 ‘오직 윤서현’이라는 조건을 전제로 계약을 제안하는데…….

“윤서현 씨. 아마 둘 중의 하나로 여기까지 오셨겠죠?”

“…….”

“날 데리러 왔거나, 아니면 내가…… 보고 싶었거나.”

강하게 쏘아보는 서현의 눈빛에도 희원의 검푸른 눈동자는 차갑기만 했다. 낮은 음성과 손끝에 실린 은근한 힘, 그의 모든 것이 더는 검어질 수 없는 블랙홀처럼 그녀를 강하게 끌어들였다.

“선택은 누나가 하는 거예요. 언제나 그랬듯이.”

2. 작가 소개

최수현

필명은 연하늘빛.

다시 생각나고, 또 읽고 싶어지는

그런 글을 써보고 싶습니다.

▣ 출간작

기다려줄래

그 여름, 나는(2016 리디북스 로맨스 대상 수상)

당신의 자리

취향의 문제

겨울, 또다시

비 내리는 밤

3. 차례

#24장

#25장

#26장

#27장

#28장

#외전

4. 미리 보기

샤워를 마치고 나온 희원이 수건으로 머리를 쓱쓱 넘기며 거울 앞에 섰다. 조금은 까칠해졌던 얼굴에 물기가 어려 이제는 어디 하나 부족한 곳이 없었다. 무심하게 돌아선 그가 거실로 향하려다 말고 서현의 장롱을 열어젖혔다.

“…….”

아직도 욕실의 뜨거운 열기가 건장한 몸에서 모락거렸다. 거기에 서현의 향기가 코끝에 감돌자 찡그리듯 눈이 감겼다. 이래서 이 집이 좋지, 굳이 옷을 입을 생각도 못 했다. 미국에 있을 땐 상상만 해보던 감촉과 향이, 이렇게 원할 때마다 펼쳐진다는 건 그에게 곧 천국을 의미했다. 당연한 수순으로 그가 서서히 손을 아래로 내렸다.

“후우.”

윤서현은 그에게 이런 여자다. 눈앞에 있고 없고가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자신에게 속한 모든 감각이 그녀에게 향해 그중 하나만 열려도 본능이 바짝 섰다. 서현의 향을 가득 들이마시는 것만으로 손안의 뜨거움이 더욱더 크게 팽창했다.

이 장롱 가져가버릴까.

잠시나마 진지한 고민에 손짓이 더 빨라졌다. 당장에 미국으로 가야 할 텐데, 서현을 다시 볼 때까지 죽은 듯 살려면 그 수밖엔 없다.

“……씹,”

꾹 다물었던 입에 작게 욕설이 스쳤다. 아무리 무시하려 해도 저 정도로 휴대전화가 울려대니 기껏 집중하던 그녀의 이미지가 흐트러졌다. 희원이 무시무시한 얼굴로 침대에 던져둔 휴대전화를 주워 들었다.

- 야, 서희원! 이제 다 됐어! 얼마나 맘고생 많았냐?

“…….”

진짜 마음고생은 다름 아닌 지금 하고 있다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주한은 흥분이 가득했다. 갑자기 모든 열기가 팍 식어버린 희원이 침대에 주저앉아 몸에 남아 있는 물기를 털어냈다. 그가 아무리 종잡을 수 없고 자기중심적인 인물이어도, 자신의 일에 이토록 기뻐하는 친구에게 욕을 내뱉을 순 없었다.

“어. 그래.”

그것도 당장에 그걸 못 하게 되었다는 이유로는.

- 어휴. 인터넷에도 그렇고, 사람들 변하는 거 한순간이더라.

“뭐.”

- 나 같은 사람은 그냥 하던 일이나 잘해야지, 시켜준대도 못 하겠어. 그건 그렇고 너 이제 국민 의리남 돼서 당장에 팬카페 인원만 몇 배로 늘었대. 뉴스 봤어?

서현의 옷을 들여다볼 시간도 부족한 판에, 티브이는 켠단 생각조차 못 했다. 그나마 틈틈이 서현이 비친 부분을 편집 받아 돌려볼 땐 있었지만 그마저도 절정의 순간엔 언제나 눈을 감았다.

아주 머릿속이 주르르 녹아버려 생각이란 걸 할 수 없는 몽롱함, 절대로 현실로 돌아가고 싶지 않을 만큼의 짜릿함.

그러다 보니 아끼고 아끼다 승리를 할 때만 자축의 기념으로 열어보았다.

- 진짜 대단해. 그나저나 넌 언제 그런 일까지 했냐? 너 진짜 그랬었어?

“그랬겠지.”

무슨 소릴 듣든 심드렁하니, 무슨 얘기냐 물어볼 마음조차 없었다. 뭐가 됐든 서현이 손봤을 테니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누군가를 죽였다 한다면 그랬다 할 것이고, 완벽한 승리를 거두라면 그건 더 자신이 있고.

- 그래도 한국 온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가? 진짜 서운해. 다시 오는 거 맞지?

“……그것까지 나왔어?”

- 어. 방금 케이블 스포츠 보는데 회장님 나오시더라고. 원래 무대로 돌아갈 시간이 됐다고 어쩌고. 다른 인터뷰 때도 그렇고 완전 연예인이야. 말이나 표정이나 얼마나…… 야? 듣고 있어?

“아니. 끊어.”

희원이 급하게 머리맡의 리모컨을 찾았다. 꾹꾹 눌러 케이블인지 뭔지 이 채널 저 채널 돌려봤지만 쓸데없이 자신의 경기 영상만 자료화면으로 나오다 마는 것에 이내 리모컨을 던져버렸다.

오늘 타이밍 안 맞네.

며칠 만에 겨우 집중 좀 하려는데 일이 왜 이렇게 꼬이는지 모르겠다. 그나마 다행인 건 이곳이 여전히 서현의 방, 서현의 침대, 그리고 그녀의 향이 가득하다는 것.

“…….”

그 생각은 본능에 가까워 리모컨보다 더 빠르게 작용했다. 어차피 못다 푼 욕망이라 이 정도 다시 세워내기까진 시간을 잴 것도 없었다. 서현이 올 때가 되었는데, 소민에게서 언뜻 들었던 출발시간을 기억해냈다. 어쩐지 오늘따라 목소리가 좀 떨린다 싶기도 했지만 이름도 다 모르는 여자의 목소리가 어땠든 별 관심은 없다.

지금 할까, 나중에 할까.

어차피 둘 다 할 테지만 고민하는 시늉은 나름대로 의미가 있었다. 어쨌거나 한 번이라도 더 그녀를 생각하는 거였으니 열기를 지피기엔 딱 적당했다.

「……네 애인만 할 거야.」

마침 적절히 떠오르는 환청은 손짓에 더 힘을 실었다. 그 정도 말이라면 진짜 애인이 되건 부인이 되건 상관없이 족히 몇십 년은 그를 따라다닐 것이다.

“흐읍.”

단전 아래 힘이 바짝 몰렸다. 오늘은 조금 느긋하고 싶었는데 며칠 만이라 그런지 조절이 힘들었다. 차라리 빨리 끝내버리고 한 번 더 하는 편이 좋지 않을까, 희원은 이런 순간엔 쓸데없이 합리적이었다.

“후우!”

귀가 점점 먹먹해진다 싶더니 이번엔 초인종이 그를 괴롭혔다. 서현이라면 벨을 누를 리가 없을 텐데, 희원의 거친 심기가 야생 한가운데에 풀려났다.

누가 됐든 평생에 없을 후회를 하게 해주겠다며, 몸에 수건을 감았다. 자신을 방해한 건 둘째 치더라도 감히 서현이 혼자 사는 집을 멋대로 찾아왔다는 자체가 분노를 돋우었다.

자신이 제집에는 발도 들이지 않고 멋대로 들어와 샤워를 하고 옷장을 열어젖히고, 자신의 향을 온데 묻혀두는 것과는 전혀 별개의 문제이다. 현관까지 나아가는 걸음의 기세가 심상치 않았다.

이 시간에 어떤 놈이, 설령 둘의 사이를 눈치챈 기자가 되었다 치더라도 상관할 바 아니다. 야차 같은 얼굴의 희원이 한 치의 망설임 없이 문을 훅 열어젖혔다.

“서현아. 연락도 없이 내가 아…….”

“…….”

“서, 서희원 씨가 여기 왜.”

초조하게 복도를 서성이던 남자는 희원도 익히 아는 인물이었다. 그리고 한때 그의 심기를 세상 끝까지 난폭하게 만들 수 있었던 인물이기도 했다. 지금은 분노도, 체념도 아닌 얼굴로 그를 맞는 희원에게 은근한 느긋함이 드러났다.

“오랜만에 뵙네요, 오민석 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