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작품 소개

“내 이름이 당신을 힘들게 한다면, 난 에이롯샤라는 이름을 버려요. 공주로서의 내 삶을 버려요. 그것이 당신에게 괴로움이라면, 나는 그 이름을 부정하겠어요. 난 이제부터 롯시예요.”

수학 강국, 할만. 어느 날 국왕에게 대륙 최고의 수학자 카이 렌으로부터 나라의 운명을 결정지을 중요한 편지가 도착한다. ‘에이롯샤 공주를 3년간 내게 보내달라. 그렇지 않으면 왕국방어선이 위태롭다.’ ……모든 문제는 거기서부터 시작되었다.

수학의 탈을 쓴, 수를 사랑하는 수학자와 그를 사랑한 현명한 여자의 동화 같은 사랑 이야기!

“약혼녀가 거짓이라면, 거짓말을 하고 싶지 않다면 사실로 만들면 돼요. 약혼하죠, 우리.”

“드디어 미쳤군요.”

“그래요. 당신 말대로 미쳤군요. 내가, 미쳤어요. 그 할만 왕국의 에이롯샤 공주님에게 약혼을 청하다니 미쳤군요, 제대로.”

“카이…… 약혼해요, 우리. 임시지만 약혼하자구요!”

“롯시, 그대도 미쳤군요. 우리 임시라도. 언젠가는 끝이 보인다 할지라도, 영영 보름달의 외로움에서 내가 벗어나지 못한다 할지라도. 그래도 해요, 롯시. 그래도…….”

※ ‘가하 에픽’은 다양한 시대, 색다른 소재, 독특한 인물들의 이야기를 담은 도서출판 가하의 새로운 브랜드입니다. 로맨틱한 판타지가 가득한 가하 에픽, 지금 만나보세요!

2. 작가 소개

한하연

쓰는 일이 좋아서 시작했다가 지금도 쓰고 있는 평범한 글쓴이.

동화와 귀여운 걸 좋아하지만 지극히 현실적인 면도 있는 그런 사람.

▣ 출간작

그녀는 수학을 배운다

엘핀느의 꽃

붉은 벨벳 위 하얀 진주 한 알

달콤한 말 세 방울

푸른 단검과 흰 장미

집(House) - 단편집

비밀의 숲 - 박소연 작가와 공저

▣ 출간 예정작

맑은 하늘 푸른 잎새

목련화

3. 차례

#0. 프롤로그

#1. 점은 부분을 가지지 않은 것이다

#2. 선은 폭이 없는 길이이다

#3. 선의 양 끝은 점이다

#4. 직선이란, 그 위의 점에 대해 한결같이 늘어선 선이다

4. 미리 보기

“그래도 날 좋아하잖아요, 롯시. 안 그래요?”

“안 그래요!”

“아아……. 좋으면서 아닌 척하기는…….”

“아니라구요, 카이 렌!”

“카이.”

차분히 그가 자신의 이름을 정정했다.

“약혼녀가 사실이 아니라면, 거짓말을 하고 싶지 않다면, 사실로 만들면 돼요. 약혼하죠, 우리.”

“네?”

“진담이에요.”

나는 기가 막혀서 한마디 내뱉었다.

“드디어 미쳤군요.”

“난 제정신이……. 하아, 그래요. 당신 말대로 미쳤군요. 내가, 미쳤어요. 할만 왕국의 에이롯샤 공주님에게 약혼을 청하다니. 미쳤군요, 제대로. 그 할만 왕국의 공주님에게. 일이 이렇게 될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어. 아니, 애초에 아이샤가 관여한 시점에서 예상했어야 했던 건가?”

“카이!”

“약혼해요, 우리. 언젠가의 언젠가를 위해서. 그래도 3년 후에는, 아니 지금 당장이라도 당신이 원하면 할만 왕국으로 보내줄게요. 그것이 어쩌면 가장 좋은 일일지도 몰라요…….”

우리는 어느새 걷던 걸음을 멈추고 서로를 진지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렇다. 이것은 농담 따먹기처럼 간단히 이야기할 문제가 아니라는 걸, 둘 다 잘 알고 있었다. 그가 아무리 세상사에 비상식적이라 해도 그는 날카로운 데가 있었고, 나는 성격이 급하다 해도 기본적인 책임감은 가지고 있었다.

“서로를 위해서.”

앞뒤 안 맞는 말을 해댄 그는 잠시 정말 곤란한 얼굴이 되었다. 약혼을 하자고 하더니, 다시 보내주겠다고 했다가, 그러다가 그것이 서로를 위하는 길이라고 했다. 약혼을 하자는 게 서로를 위하는 길이라는 것인지, 아니면 나를 보내주는 것이 서로를 위하는 길이라는지 본인도 엉키는 모양이었다. 그러더니 그가 내 손을 잡고 있던 손을 풀러 눈가로 잠시 손을 올렸다.

“이번 일은 그냥 잊어줘요. 내가 정말 미쳤나 봐요. 내가 정말…….”

“……카이.”

그 모습에 나는 카이를 한번 불렀다.

“왜요?”

아, 저 맹숭맹숭한 남자. 이랬다가 저랬다가 남자가 저렇게 마음도 잘 바뀌고. 게다가 왜 바뀌는지 이야기도 명확히 하지도 않고. 그래도 어쩌겠어. 그래도, 나는 그런 모습의 카이라도 좋은데.

“약혼해요, 우리. 임시지만 약혼하자구요!”

“하아?”

“아무튼, 그렇게 해요!”

“롯시…….”

그런 나를 그가 짐을 잠시 내려놓고 바라봤다. 하아, 한숨인지 뭔지 모를 것이 나왔다가 어쩐지 그가 기가 막힌 듯 웃었다. 하지만 그 웃음은 곧 행복한 표정으로 바뀌었다. 참 종잡을 수 없는 남자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더니 그가 천천히 나에게 두 팔을 벌렸다. 그리고 나에게 안기라는 식으로 손짓을 했다. 저번의 찻잔 때와는 달리 뭔가 더 부끄러웠다. 이번엔 내가 먼저 다가가는 거니까, 더더욱. 그러나 나는 그에게 안겼다. 그에게 안기자, 카이 특유의 남자 스킨 향이 났다. 그리고 그만의 체취. 익숙해질 것 같은 그의 냄새.

그러나 어딘지 감격 어린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전혀 로맨틱하지 않았다.

“롯시, 그대도 미쳤군요.”

“임시라니까요! 여기 있는 동안에!”

어쩐지 오기가 나서 나는 외쳤다.

“그래요, 해요. 우리 임시라도. 언젠가는 끝이 보인다 할지라도, 영영 보름달의 외로움에서 내가 벗어나지 못한다 할지라도. 그래도 해요, 롯시. 그래도…….”

하아, 안 그런 듯하면서도 은근히 냉소적인 데가 있다, 이 남자. 다정하고 애교부리는 귀여운 면모 뒤에 가끔 이렇게 얼음조각 섞인 말을 내뱉어서 그가 상처를 안고 사는 사람임을 나에게 각인시킨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평생 가슴 안의 상처 하나만을 들여다보고 살 수는 없다. 그런 인생은, 서글프지 않은가?

“그런 표현보다는…….”

내가 안긴 채로 웃으면서 그를 올려다봤다. 어쩔 수 없었다. 키 차이가 나니까. 그러나 사이즈와는 상관없이, 다정히 안는 것은 나에게 허용되었다.

“카이, 이렇게 말해봐요. 이 임시가 언젠가는 평생이 될지라도. 언젠가는 끝을 함께 본다 할지라도, 보름달이…….”

나는 빙긋이 웃었다. 그래, 어째서 늘 부정적으로 생각해야 하는가? 과거의 아픈 기억이, 앞으로의 시간마저 지배한다면 그런 인생을 슬프지 않을까.

“외로움의 표현이 아니라 언젠가는 그것이 함께 보는 것이 될지라도, 우리는 약혼하겠다고요.”

“……나랑 같이 있겠다고요?”

“네.”

“나와 같이 지내는 삶이, 그대에게 괜찮다고요?”

“네. 괜찮아요.”

“……알았어요.”

“하아, 카이. 정말. 남자가 이렇게 미덥지 못해서야.”

“대신 그대가 야무지니까 괜찮아요.”

나는 발꿈치를 들고 카이의 뺨에 살짝 입 맞췄다. 카이도 감 좋게 살짝 수그려주었다. 그리고 그대로 두 팔로는 계속 나를 안아주었다. 알 수 없는 어떤 것을 감추고 있는 카이의 경계를 살짝 허물어트리고 나는 그대로 그에게 들어갔다. 그는 나를 천천히 받아들여주고 있었다.

이렇게 눈치 빠르면서, 가끔은 거북이 저리 가라 싶게 구는 건 어째서인지 나는 잘 모르겠다. 긴장감 탓인지 그의 얼굴이 좀 차가운 것 같기도 하다.

“가끔은 모든 게 논리적으로 흘러가지 않을 때도 많아요. 왜 그렇게 미친 짓이라고 생각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우선은 납득할 수 있게 설명을 해봐요. 그리고 같이 판단하자고요. 이것이 미친 짓인지, 아니면…….”

카이와 눈을 맞추고 나는 분명하게 말했다.

“우리 생에서 가장 잘한 일일지.”

나는 생긋 웃었다.

그러나 카이는 그 점에 대해서 더 이상 설명하지 않았다. 우리는 그 이후에 특별하게 뭔가 색다른 것은 하지 않았다. 그저 돌아가는 동안 손을 꼭 잡고 걸어갔을 뿐이다. 우리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고, 전과는 그다지 차이가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하게 다른 것은, 이제 내 심장은 그를 향해 오롯이 뛰고 있다는 사실이다.

임시라고 이름 붙은 괴상한 모양새의 약혼일지라도, 이제 그는 내 약혼자다. 우리는 약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