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
뒤도 안 돌아보고 나갔던 태희가 잔뜩 성이 나서는 들어왔다.
“왜!”
안 그래도 배가 고파 신경이 곤두서고 있던 중인데 별안간 야, 라고 부르며 들어오는 태희를 보자 지수는 버럭 화가 났다.
“도대체 노인네한테 뭐라고 한 거야?”
역시나 싸가지 윤태희의 약점은 아버지였나 보다.
“물어보시는 거에 아는 만큼 답했는데요.”
뿔이 난 아이처럼 씩씩거리는 태희를 보자 슬그머니 화가 가라앉았다. 그래서 다시 지수는 말끝에 ‘요’ 자를 붙여 줬다.
“그래서 내가 인정머리 없이 버려두고 놀러 나갔다고 했어?”
“놀러 나간 거였어요?”
지수가 앙큼하게 눈을 치켜떴다.
“난 그냥 나갔다고만 했는데요.”
“버려두고?”
“버려두고 나간 거였어요? 그것도 몰랐네.”
당찬 게 아니라 당돌한 거였다. 순진하게 생긴 게 아니라 순진한 척 연기를 한 거였다.
“너 뭐야?”
“뭐가요?”
“너 뭐냐고?”
태희는 긴 다리를 접고 지수 맞은편에 앉았다. 후, 길게 한숨을 내쉬고는 목을 조이는 답답한 넥타이를 거칠게 풀었다.
“지수요.”
“성이 ‘지’고 이름이 ‘수’야?”
“아니요, 이름이 지수예요.”
“성은 없어?”
“있어요.”
한 번에 다 대답하면 되는데 사람 염장 지르는 것도 아니고, 꼭 여러 번 묻게 만드는 지수 때문에 태희는 거의 인내심의 한계를 느끼고 있었다.
“그러니까 정확한 이름은 뭐고, 여기에 왜 왔으며, 내 아버지와는 무슨 관계냐고. 사람 피곤하게 하지 말고 한 번에 말해.”
간만에 괜찮은 여자 만나 신 나게 놀고 있는데 호텔 지배인이 내려와 태희를 불러냈었다. 그러더니 핸드폰을 내밀었다. 그리고 대뜸 핸드폰 너머에서 험악한 욕이 쉼 없이 튀어나왔다. 그에 태희를 찾으러 나온 여자가 핸드폰 밖으로 흘러나오는 욕을 듣고는 입을 떠억 벌리고는 그대로 가 버렸다. 제대로 쪽팔린 순간이었다. 그런데 집에 들어와 버젓이 소파를 차지하고 있는 지수를 보자 화가 더 치밀었다.
“그쪽 아버지랑은 친구예요.”
아버지를 넘어 할아버지라고 할 수 있는 나이 차이에도 불구하고 속을 털어놓을 수 있는 진짜 친구. 산뜻하지 못하다고 의심의 눈초리로 보는 사람도 있겠지만 그게 진실이고 사실이라 당당했다.
“그리고 여기 온 이유는 누구를 좀 찾기 위해서예요.”
지수는 낮지만 힘이 실린 목소리로 대답했다. 질문에 답을 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어려서부터 끈질기게 따라다니던 입양아라는 꼬리표로 인해 제 입으로 입양아라는 사실을 말하는 건 숨 쉬는 것만큼 쉬운 거였다. 하지만 답을 들은 뒤에 보이는 상대의 반응이 번번이 그녀를 피곤하게 했다.
“누구?”
“엄마요.”
“뭐?”
“엄마 찾으러 왔다고요.”
아무렇지 않게 말하는 지수와 달리 태희는 당황한 듯 보였다. 누군가를 찾는다고는 들었던 것 같은데 그게 엄마인 줄은 미처 몰랐던 태희였다.
“나머지 하나는 엄마 찾으면 말해 줄게요.”
이름이 지수라는 것, 얼굴은 기억나지 않지만 머리칼이 길고 다리가 늘씬했던 엄마가 있었다는 것, 그 엄마와 바닷가로 놀러 갔었다는 것만 기억나는 지수였다.


[미리보기]

“너 때문에 어설프게 마신 술마저 깨려고 한다.”
“깨면 좋은 거 아닌가?”
“술 깨는 걸 느끼는 게 얼마나 찝찝한지 알아?”
“그게 왜 찝찝해요?”
“기분 더러우니까.”
“왜 기분이 더러운데요?”
지수의 끊임없는 질문에 태희가 걸음을 멈췄다.
“왜요?”
뚫어져라 쳐다보는 태희를 지수가 빤히 응시했다. 하지만 그는 가만히 서서 바라보기만 할 뿐 아무런 말이 없었다.
“왜 그렇게 보는 건데요?”
“너 일부러 그런 거지?”
“뭐가요?”
“나하고 걷고 싶어서 일부러 나간다고 말하고 나온 거 아니냐고.”
지수가 픽, 콧방귀를 뀌었다. 몸을 돌려 발을 내딛는 지수의 팔을 태희가 붙잡았다.
“어설프게 할 거면 하지 마라.”
“또 뭘요?”
“유혹하지 말라고.”
“미치셨어요?”
지수의 콧잔등에 주름이 졌다. 태희의 손가락이 지수의 콧잔등에 닿았다. 흠칫 놀란 지수가 뒤로 몸을 뺐다. 하지만 태희의 다른 손이 지수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닿을 듯 지수와 태희의 간격이 좁혀졌다.
“술 깼다.”
찝찝하게 엉켰던 머릿속이 맑아졌다. 술은 깼고, 본능은 깨어나 버렸다. 하지만 이성은 아직 제자리로 돌아오지 못했다. 그래서 위험하다.
“깼으면 이 손 좀 치우시죠.”
“깨니까 짐지수가 왜 예뻐 보이냐.”
“난 원래 예뻐요.”
“훗.”
아무런 거리낌 없이 태희가 웃었다. 그리고 바보처럼 지수도 그를 따라 웃어 버렸다.
“네가 한 거다.”
“뭐를…….”
지수의 입술에 뜨거운 입김이 내려앉았다. 그게 누구의 것인지 인지하기도 전에 태희의 입술이 지수의 입을 막아 버렸다. 충동적인 입맞춤이었지만 태희는 물러서지 않았다. 짐지수가 자신을 유혹한 거라고 뻔뻔하게 눈을 감아 버렸다.

주미란.

1978년 3월 3일생.

No Pain, No Gain.
고통이 없으면 얻는 것도 없다.
나는 아직도 최고의 글을 쓰고, 최고의 작품을 번역하기를
희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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