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서 딱 한 가지만 남기고 다 버려야 한다면 뭘 택할 거야?’
가족과 일, 같은 것 중 더 중요한 게 어떤 거냐는 이야기야, 하고 부연 설명을 붙이는 혜승의 얼굴을 가만히 보다가 고개를 갸웃거렸던 기억이 났다. 기억력이 좋은 편은 아닌데, 불쑥불쑥 해결하지 못한 케케묵은 고민들이 머릿속에 파고들었다.
‘어떤 걸 선택할 거야?’
그 질문에 대해서 어영부영 대답도 하지 못한 채 그렇게 1년이 흘렀다. 왜 1년이 지나고 나서야 그에 대한 대답을 할 수 있게 되었을까.
“혜승아, 나 이제야 대답할 수 있을 것 같은데.”
함께 네일아트를 받던 중에 갑자기 생각이 났다. 혜승은 무슨 말이냐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나는 가족과 일에서 선택해야 한다면 가족인 것 같아. 가족과 일이라는 틀이 없다면 그래도 무언가 꼭 하나를 택해야 한다면, 믿음. 믿음을 선택할래.”
“뭐야?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을 지금에서야 하는 거야?”
혜승이 어이가 없다는 듯 웃음을 터트리며 ‘너답다.’라는 말도 잊지 않았다.
며칠 전, 윤혁과 떡볶이집에서 피 터져라 말다툼을 했다. 지지 않고, 져선 안 된다고 생각하며 주먹을 꼭 쥐고 온 마음을 다해 싸웠다. 나중에는 그가 먼저 자신이 졌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작은 짜증이 그의 미간에 맴돌아 깊은 주름을 만들었다.
“역시 나는 별로 귀여운 여자는 아닌가 봐.”
“무슨 일 있었어?”
어지간해서 혼자 주절주절 이야기하지 않는 재희가 이상했는지 혜승이 먼저 물었다.
“나, 윤혁 선배 만나고 있어. 비밀로 해서 미안해. 그래도 용서해 주라.”
“뭐? 야!”
네일숍이 떠나가라 꽥하고 소리를 지르면서 손톱 정리해 주던 언니가 놀랄 정도로 혜승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러는 바람에 네일숍에 앉아 있던 사람들이 온 시선을 집중해서 재희와 혜승을 쳐다보고 있었다.
“일단, 앉아. 사람들 다 쳐다본다. 언니 미안해요, 놀랐죠?”
재희가 그러거나 말거나 혜승은 흥분해서 연거푸 질문을 퍼부었다.
“언제부터? 그래서 만나기로 한 거야? 결혼하는 거니? 그 남자 정말 너 기억 못한대?”
이제는 귀가 따가울 지경이었다. 이곳에서 이야기를 터트리는 것이 아니었는데 후회해 봤자 이미 기차는 떠나 버린 후였다.
“너랑 점심 먹은 그날 저녁부터 만나기로 했어. 결혼은 아직 모르겠어. 그 남자 기억 못해. 그래도 우리 두 사람의 끝은 내가 낼 거야. 그렇게 이야기했어. 최윤혁 씨도 그렇게 하겠대.”
“도대체 인연이야 악연이야?”
혜승은 도대체 모르겠다는 듯이 금발의 머리를 살랑살랑 흔들었다.
그렇게 싸운 뒤로, 윤혁에게서는 전화 한 통이 없었다. 불쑥 찾아오지도 않았다. 전화를 걸어 왜 전화를 받지 않았냐고 핸드폰은 폼이냐고 화내지도 않았다. 벌써 일주일이 지났다. 아니, 그저 일주일뿐이었다.
“그래서 뭐가 문제야.”
“혜승아 나는 안정적인 게 좋아. 안정적으로 월급이 들어오는 내 일이 좋고, 안정적으로 밥을 먹고, 안정적인 사랑을 하고 싶어. 나 이제 짝사랑하면서 아파할 나이 아니잖아. 연애를 하다가 집에 보내기 싫을 정도로 사랑하게 되면 결혼하게 되는, 그런 게 좋아. 그런데 윤혁 선배는 너무 불안정해. 언제 어떻게 마음이 사라질지 불안해.”
혜승은 아무 말 없이 그저 애잔한 표정을 지으며 싱그레 웃었다.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고상하고 예쁜 디자이너 노혜승으로 돌아가 있었다.
혜승이는 핫핑크와 노란색을 선택했고, 재희는 바른 듯 바르지 않은 듯한 베이지색을 골랐다. 네일아트를 마치고 문을 열고 나왔다. 문에 달려 있는 작은 종이 딸랑딸랑 울려 퍼졌다. 왠지 크리스마스를 떠올리게 해서 크리스마스가 빨리 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하늘을 바라보았다.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날씨였다.
“조금 걷자.”
바람 따라 걸었더니 꽃 떨어진 자리로 초록색이 물들었다. 어느새 우린 스물아홉이었고, 지금 이곳은 8월이었다. 시간이 참 빠르구나.
“재희야 네가 그랬지? 이제는 사랑에 있어서는 안정을 얻고 싶어서. 윤혁 씨는 아닌 것 같다고 했지?”
“……응.”
“아이러니하게 안정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은 불안정을 만끽하는 거야. 지금을 즐겨.”
재희는 사뿐사뿐 걸으며 혜승의 말을 곱씹어 본다.
안정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은, 그만큼 불안정에 익숙해지고 만끽하는 것이라. 맞는 말인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애매모호했다.
좀 걸었더니 금세 더워져서 당장 눈에 보이는 카페로 들어갔다, 아이스 아메리카노 두 잔을 시켜놓고 서로의 얼굴을 멀뚱멀뚱 바라봤다.
“재희야, 그냥 지워버려. 네가 예전에 좋아했던 사람이라는 것도, 선을 봤다는 사실도 깨끗이 지우고. 다시 시작하는 거야.”
재희는 괜히 선뜻 대답을 하지 못하고 새치름하게 투명한 창 너머 바삐 오가는 사람들을 바라봤다.
“정말 모르겠어. 두 사람이 인연인지 악연인지. 너에게는 그저 아픈 사람인데 두 사람이 잘된다면 그것도 좋은 일이 아닐까 싶어. 재희야 네 마음 알 것 같은데, 그래도 조금 다른 시선으로 그 사람을 바라보는 것도 나쁘지 않아. 쉽지 않겠지만 처음 시작한다고 생각해.”
처음에 윤혁을 만나 서로가 진지하게 생각해 보며 만나보는 것에 동의했을 때 사실 모든 마음을 비워내며 그를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알고 있으면서도 사춘기 소녀처럼 삐죽삐죽 모난 마음이 불쑥 나타나기도 했고, 저번처럼 예쁜 말을 내뱉지 않는 그를 마주할 때는 발끈 화가 나기도 했었다.
“재희야, 나는 사랑을 시작할 때 충분한 준비운동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거든. 네 첫사랑은 그런 준비운동 없이 시작했기 때문에 더 아팠던 거야. 이제 다시 준비운동을 시작하고 그래도 이 사람과 시작하고 끝을 내고 괜찮다 생각이 들면 그때 시작해도 늦지 않아. 너답지 않게 뭘 겁내는 거야.”
정말로 그렇다. 혜승이 말한 전혀 서재희답지 않게 두려운 것들이 생겼다. 차라리, 그를 맞선자리에서 처음 만나 서로 다가가야 하는 거리의 사람이라면 조금 덜 무서울 텐데. 그에게 수없이 고백하고 거절당한 기억들이 종종 아프게 맨 살갗을 찌르곤 했다.
“사랑의 준비운동?”
“그래, 운동에만 준비운동이 필요한 게 아니라고. 사랑에도 적절하게 아파도 울지 않을 준비운동, 상처 받아도 그것을 받아들일 준비운동이 필요한 거야. 선배를 좋아했었던 그때의 너에게는 그런 것들이 없었잖아.”
무작정 그가 좋아서, 그가 너무 좋아서 좋아해요 하고 고백했었다. 그는 매번 아직도 지치지 않았냐는 듯 혹은 지겨워 죽겠다는 표정을 지으며 성의 없게 거절을 하곤 했었다.
“어머, 재희 씨?”
낯익은 목소리다 싶어 고개를 돌리니 얼마 전 도서관에서 만났던 서진과 그런 그녀 곁에 멀뚱히 재희를 바라보고 있는 윤혁이 눈에 들어왔다.
주말이었다. 그것도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하늘과 뜨겁도록 내리쬐는 아주 좋은 날씨의 휴일이었다. 이렇게 좋은 날, 편안한 옷차림의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자니 마음이 다시 욱신거리는 건 어쩔 수 없는 모양이었다.
윤혁을 알아본 혜승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윤혁에게 다가갔다.
“안녕하세요? 저는 재희 친구 노혜승입니다. 윤혁 선배 만나서 반갑습니다.”
윤혁은 조금 당황한 표정을 짓다가 이내 재미있는 일이 생겼다는 듯 고개를 까닥 숙여 인사를 하며 혜승이 내민 손을 맞잡았다.
수많은 압구정의 카페 중에서 왜 하필 이곳이었고, 서진과 윤혁도 왜 이곳이었던 걸까. 혜승의 말대로 악연인지, 인연인지 도대체 모르겠다.
“네, 최윤혁입니다. 반갑습니다, 노혜승 씨.”
그를 우연히 만난 것이 반갑고 즐거우면서도, 같이 있는 서진이 신경 쓰였다. 재희는 다 마시지 못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손에 쥐고 혜승을 불렀다.
“혜승아, 가자.”
“어딜?”
“어디든…….”
혜승의 가방까지 든 재희를 저지한 사람은 윤혁이었다. 그의 입가가 굳어져 있는 것을 보니 화가 난 것이 틀림없었다. 재희의 손목을 움켜쥔 윤혁의 힘에 손목이 점점 호흡하기 곤란하듯 파닥거렸다.
“놔요.”
“이야기 좀 하지.”
고작 일주일 동안, 이 남자가 궁금했었다.
일이 버거운 건 아닌지, 나날이 까칠해진 게 과한 업무 때문은 아닌지, 아직도 긴 와이셔츠를 입으며 더워하는지. 사람의 마음이란 간사했다. 그렇게 보고 싶지 않다 생각하면서도, 마음 깊은 구석에서는 이렇게라도 우연히 만나길 바랐던 건지도 모르겠다.
“재희야, 나 먼저 간다. 이야기 천천히 하고 와. 분명 내가 말했지?”
혜승은 미련 없다는 듯이 가방을 메고 다 마시지 않은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들고 쿨 하게 뒤돌아섰다. 곁에 서 있던 서진도 할 일이 생겼다며 자리를 피했다. 그러니까, 이곳에 윤혁과 재희 두 사람만이 남겨져 있었다.
“잘 지냈어?”
윤혁이 물었다. 자리에 앉은 재희는 윤혁을 쳐다도 보지 않은 채로 희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네가 궁금했는데.”
“잘 지낸 것 같아 보여요. 그래서 잘 지냈냐고 묻지 않을게요.”
윤혁은 오랜만에 만나 얼굴도 보여주지 않는 재희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일주일 동안 마치 줄다리기를 하는 것처럼, 누가 먼저 연락 하나 안 하나 시합이라도 하듯 그렇게 팽팽하게 줄을 놓지 않았다. 현준은 그런 윤혁을 보며 ‘져 주면 어디가 덧나냐.’ 하고 투덜거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쑥 그녀를 찾아가, 화를 풀어주지 않았던 이유는….
“잘 지내지 않았는데. 어딜 봐서 잘 지낸 것 같아 보이는 거지?”
“그래요, 그러면 그런 거네요.”
재희는 끝까지 그와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잘 손질된 손톱만 바라볼 뿐이었다. 분명 방금 전까지 혜승과 생긋 웃으며 이야기 나누던 재희는 사라져버렸다. 윤혁이 기억하는 한 재희는 잘 웃고, 잘 먹고, 잘 넘어지는 아이였다.
“연락하지 못해서 미안해.”
그제야 재희가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크고 맑은 눈에는 어떤 감정도 보이지 않겠다는 굳은 의지가 담겨 있었다.
“그래도 연락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인지는 몰라도 네가 가지고 있는 그 틀 안에서 혼자서 스스로 헤쳐 나오길 바랐던 거야.”
“만들어 놓은 틀 같은 거 없어요.”
“너한테는 가느다란 선 같은 거 있어. 차라리 차가운 사람이면 차가운 사람이라고, 다가오지 말라고 말하는 게 나아. 어중간해. 이것도 저것도 흥. 싫으면 싫은 거고 좋으면 좋다고 말해 줘. 나는 말해 주지 않으면 몰라.”
재희의 표정이 굳어지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윤혁은 말을 이어나갔다.
“내가 싫으면 싫다고 말하면 되는 거고, 좋으면 좋다고 말하면 되는 거야.”
이기적이다, 최윤혁.
“내가, 내가요.”
재희가 중요한 말이라도 꺼낼 것처럼 그렇게 뜸을 들이며 첫마디를 내뱉었다. 윤혁은 그런 재희와 눈을 마주치며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내가, 최윤혁 씨 좋아했어요. 되게 많이, 좋아했었어요. 만날 고백하고, 꽁무니 쫓아다니고. 한때는 윤혁 씨가 내 전부였거든요.”
윤혁은 대답 없이 그저 죽을힘을 다해 주먹을 꼭 쥐고 이야기를 하는 재희를 바라보았다. 윤혁과는 눈도 마주치지 않은 채였다.
“윤혁 씨는 기억하지 못하는 그저 찰나의 순간이었을지라도, 나에게는 톡 건드리면 겨우 아문 상처가 다시 아파질 것 같아서요. 겁쟁이라고 해도 좋고 비겁하다고 해도 좋아요. 적어도, 윤혁 씨는 외사랑은 해본 적이 없잖아요. 그러니까 이루어지지 않는 짝사랑이든 외사랑이든 노력하지 않아서는 아니에요. 진심을 다해 고백하고 노력해도, 최윤혁 씨는 서재희라는 여자 기억조차 하지 못하잖아요. 그냥 말하고 싶었어요. 최윤혁 씨가 그렇게 생각하고 결정짓는 모든 것들이 사실은 그것이 진실이 아닐 수도 있다는 거, 말하고 싶었어요. 이걸 말하고 싶어서 나는 화가 났는지도 몰라요.”
울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아까보다 더 단단해진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며 이야기하는 재희는 확실히 그가 알고 있었던 대학시절의 그녀는 아니었다. 이제는 이야기해야겠다고 생각하며 윤혁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기억하고 있어. 서재희, 기억하고 있다고.”
윤혁의 말에 재희가 동요한 듯 눈동자가 흔들렸다.

살고 있는 곳은 지구 한 가운데.
나이는 파릇파릇하진 않지만 꽃다운 나이.
목표는 행복해 지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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