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한 번 묻죠. 당신은 누구죠?”

“정유하라고 합니다. 그리고 김부희, 당신의 남편이기도 하지요.”

교통사고로 2년의 기억이 사라진 부희.

친구의 도움으로 집에 오긴 했는데 웬 고급아파트가 내 집이라고? 거기다 결혼?

낯선 공간에 낯선 사람이 찾아와 내 남편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 사람 너무 내 취향이다.

흐뭇한 미모의 연하 남편! 너무 좋은데?

“앞으로 당신 남편에 대해 관심을 가져 보도록 하십시오. 나 역시 당신의 진심을 알아낼 테니 말입니다.”

이렇게 근사한 남편이라면 그깟 기억쯤 안 돌아와도 좋을 거 같다.

현재의 그를 알아가는 재미가 나름 쏠쏠하다.

은근히 도발하는 그의 유혹에 한번 넘어가볼까? 하는데

“부희 씨, 또 몰래 사라질 건 아니죠?”

유하의 부탁으로 접근한 사람이 오히려 나를 알고 있다.

‘문형우’ 그는 또 누구지?

“설마, 당신 앞으로 리어사의 주식이 있다는 것도 몰랐나요?”

나도 모르는 주식이 있다니 도대체 사라진 기억 속에 뭐가 있었던 거야?

하나둘씩 나타나는 새로운 사실들.

사라진 2년 안에는 어떤 기억이 있는 것일까?

“당신이 기억을 잃은 게…… 어쩌면 나한텐 행운일지도 모르겠군요.”

[본문 내용 중에서]

“앉아도 되겠습니까?”

남자가 나를 질책하듯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어왔다. 순간, 나는 이 남자가 어떻게 여길 들어온 건지보다 이 사람이 나와 무슨 관계로 얽혀 있는지가 궁금했다.

“앉으세요…….”

남자는 내 말에 따라 순순히 회색 소파에 몸을 내렸다. 그리곤 지쳤다는 듯 목을 조이는 넥타이를 슬며시 끌어내렸다.

그의 스스럼없는 모습에 미묘한 떨림이 일었다. 매끈한 라인을 자랑하며 부드럽게 닫힌 입술을 보니 알 수 없는 긴장감마저 가슴을 훑고 지나갔다.

“노골적으로 쳐다보시는군요.”

집요한 내 시선에 남자가 옅은 미소를 흘렸다. 당황한 나는 뜨거워진 얼굴을 감추려 맥주를 한 모금 들이켰다. 식도를 타고 넘어가는 알싸한 알코올의 기분 좋은 느낌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런데 누구시죠?”

난 맥주를 내려놓으며 남자의 신분을 물었다. 직설적인 나의 질문에도 남자는 당황한 기색 하나 없이 여유로운 표정을 유지했다.

“그동안 우리 사이가 소원했다는 건 인정합니다. 그렇다고 모른 척을 하는 건 좀 당혹스럽군요.”

남자가 긴 속눈썹을 내리깔며 유리 테이블 위의 맥주 캔을 바라봤다. 잠시였지만 남자의 그윽한 시선이 아름답게 느껴졌다.

난 두꺼운 거실 유리에 등을 기댄 채 팔짱을 꼈다. 젖은 머리카락을 손으로 쓸어 넘기며 남자의 행동을 주시했다.

“다시 한 번 묻죠. 당신은 누구죠?”

난 내가 만만한 상대가 아니라는 것을 알려 주기 위해 일부러 힘주어 말했다. 그게 효과가 있었는지 탁자 위로 향했던 남자의 시선이 천천히 내게로 옮겨왔다. 온화해 보이지만 결코 착해 보이지 않는 강렬한 눈빛이었다.

“그 사이 내 이름도 잊어먹은 겁니까?”

그는 입가가 살짝 올라갈 정도로 미소 짓더니 곧 언제 그랬냐는 듯 차가운 표정으로 돌변했다.

“정유하라고 합니다. 그리고 김부희, 당신의 남편이기도 하지요.”

“네?”

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크게 터져 나왔다.

말도 안 돼!

뜬금없이 나타난 남자가 내 남편이라니, 세상에 이런 사기꾼이 어디 있단 말인가. 나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진중하게 사귄 남자 한 명 없는 순수한 몸이었다. 그런 나에게 기억에도 없는 남편이라니, 이건 어불성설이었다.

나의 부정적인 눈빛을 읽은 건지 유하라고 자신을 소개한 남자가 슬며시 몸을 일으키며 재킷을 벗었다.

“농담은 그만하고, 본론으로 들어가죠.”

남자는 사무적인 말투로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낯선 사람을 대하듯 그는 가장 가까운 아내에게도 깍듯이 존대를 썼다. 그것은 우리 두 사람이 가까워질 수 없다는 일종의 경고처럼도 느껴졌다.

난 입을 꾹 다문 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그는 나에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 한 걸음 앞으로 다가왔다.

“난 당신이 말한 모든 조건을 지켰습니다. 그러니 김부희 씨도 내 조건을 들어줘야 합니다.”

“조, 조건이라뇨?”

그가 재킷을 소파 위에 내려놓은 뒤 와이셔츠의 첫 단추를 풀어냈다.

난 이 남자가 단순히 덥기 때문에 저런 행동을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나의 예상을 깨고 두 번째 단추마저 풀어내며 내게 한 발짝 더 다가왔다.

“김부희 씨는 결혼은 허락하되 부부관계는 시간이 필요하다 했었습니다. 그리고 난 충분히 김부희 씨의 의견을 수렴하여 미국에 있을 동안은 자유를 주겠다고 약속했었지요.”

부부관계는 뭐고 자유는 또 뭐란 말인가, 도무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그, 그런데요?”

남자는 헐렁거리는 넥타이를 끌어내려 바닥으로 떨어트렸다. 그리곤 짓궂은 웃음을 날리며 세 번째 단추를 풀어냈다.

“내가 한국에 돌아오는 순간 김부희 씨는 부부관계를 허락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저는 오늘, 한국에 돌아왔습니다.”

[프로필]

백선로드

필명 ‘백선’과 ‘더로드’가 만나 백선로드라는 이름으로 탄생.

백선과 더로드는 친자매로 현대물과 역사물 그리고 판타지 등 여러 장르를 좋아하며, 여러 종류의 글을 적기 위해 노력중이다. 각자의 이름으로 출간된 작품이 있지만 현재 이북으로는 백선로드라는 이름으로만 출간중이며 앞으로도 많은 작품을 같이 구상 중에 있다.

출간작

[사랑 불변의 법칙] [정신줄 놓은 신사] [아름다운 태왕, 을불] [커피 그리고 설탕 한 스푼] [남편의 유혹] [이중인격 바로잡기] [셰리] [1000℃아이스크림] [동궁에 부는 바람] [내 아내의 프러포즈] [나를 잊지마] [뜨거운 입술]

[목차]

# 01. 첫눈에 반하다

# 02. 미스터리 이 년

# 03. 유혹

# 04. 친절한 그 사람

# 05. 질투

# 06. 진실

# 07. Grieve(슬프게 하다)

# 08. 또 다른 사실

# 09. 사라진 과거

# 10. 거짓

# 11. 고백

에필로그 ⅰ

에필로그 ⅱ ― 정유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