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작품 소개

“나와 결혼해주시겠습니까?”

혼자 누르고 참으며 살아내는 것이 너무나도 익숙한 서민하. 5년간 짝사랑해온 선배로부터 고백받은 날 저녁, 뜻밖에도 다른 세계로 떨어져버린다! 왕이 되려는 르 프란델의 대관식 날 그를 깔아뭉개며 떨어져 내린 탓에 순식간에 예언의 주인공 은의 레이디가 되어버린 민하.

그녀가 택하는 자가 태평성대를 가져올 왕이 된다는 빗나갈 수 없는 예언의 존재 때문에 그녀를 못마땅해 하는 차가운 미남자 프란델을 비롯해, 프란델과 대비되는 화려한 미모와 유혹적인 태도를 보이는 왕족 엘 카이레스에게 청혼을 받는데……. 원래의 세계로 돌아가려는 민하는 프란델과 가짜 약혼을 하게 되고, 점차 은의 레이디로서 사건에 휘말리게 된다.

“간절한 마음으로 청하오니,”

그리고 그가 고개를 들었다. 푸른 눈으로 조용히 민하를 올려다본다.

민하도 그의 눈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주변은 온통 밝고 어두웠으며 파도치는 소리만이 간간이 들려오고 있었다.

그렇게 아주 잘 들리는 목소리로 그가 말을 꺼냈다.

“저와 결혼해주시겠습니까?”

2. 작가 소개

남수아

커피 줄이기를 평생의 과업으로 삼고 하루하루 정진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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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차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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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미리 보기

민하가 잠에서 깼을 때, 주변은 여전히 어수선했다. 전화벨 소리와 종이 스치는 소리,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 소리를 들으며 앞을 보았다.

앞에는 바로 옆자리에 잠들어 있는 셰리카가 보였다. 잠들어 더 여려 보이는 요정 같은 얼굴을 바라보며 민하는 웃음을 담았다.

「민하가 좋아.」

잠결에 그 고백을 들었던 게 기억났다. 민하가 잠든 줄 알고 슬며시 꺼낸 고백은 따뜻한 울림을 남겼다. 좀처럼 안 다가오던 강아지가 마침내 발목에 고개를 부벼온 듯한 느낌과 그에 따른 미안함이 교차하는 기분이었다.

‘어제는…… 내가 미쳤지.’

어제 프란델과의 키스를 떠올린 민하는 얼굴이 확 달아올라 고개를 탈탈 털었다. 그냥 미친 거다. 미쳤다고밖에는 생각할 수 없었다.

‘다시는 그러지 말아야지.’

마음을 단단히 먹고는 침대 밖으로 나왔다.

이곳 오르곤에 몰려온 에상트 군은 물리쳤지만 그들은 여전히 국경도시 칼라마린을 차지한 채 버티고 있었다. 며칠 후 이곳으로 아군의 원군이 오기로 했지만, 원군을 합쳐도 칼라마린을 차지한 에상트 군의 숫자보다 부족한 모양이었다.

칼라마린은 성벽으로 둘러싸인 도시라고 했다. 전쟁에 대해 아는 건 없지만 판타지 영화들만 떠올려봐도 그런 도시를 되찾는 덴 큰 희생이 따른다는 걸 짐작할 수 있었다.

‘아무래도 상황이 좋지 않은 것 같은데. 다들 괜찮으려나?’

민하는 양치질하며 상황판 앞에서 생각했다. 아무도 민하에게 불안한 예상을 전하진 않았지만 실내를 채운 분위기는 말보다 많은 것을 느끼게 했다.

그 속에서 민하는 자기 일을 고민했다. 차원의 문이 열리는 시간표를 앞에 두자 고민이 선명해졌다.

‘다음 문은 한 달 후…….’

한숨이 나왔다. 이번에 문이 열리는 것엔 아무래도 맞추기 힘들 것 같은데, 다음 문은 한 달 뒤에나 열렸다.

선배와 연결된 휴대전화는 지난밤 산 위 별장에서 뛰쳐나오다가 잃어버렸다. 그렇게 한참 동안이나 연락이 안 되다가 돌아가서 선배에게 무슨 변명을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는 생각만 들었다.

‘애초에 거짓말을 하지 말 걸 그랬나…….’

민하는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톡톡 건드리며 생각에 잠겼다.

빨리 돌아갈 수 있을 줄 알고 했던 거짓말이었다. 선배에게 이상한 소리 하는 여자로 보이고 싶지 않았다.

그 생각이 민하를 더 이상한 사람으로 만들어버렸다.

‘있는 그대로 다 얘기해도 괜찮을 것 같지가 않아서…….’

생각 끝에 민하는 입을 다물었다. 그때는 그게 타당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거짓말이 늘어나고 곤란해진 지경까지 오자 다른 부분까지 생각이 미쳤다.

사귀게 되면 또 다양한 문제와 만나게 될 터였다. 그때도 민하는 있는 그대로의 고민을 선배에게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좋아하는데. 정말로, 좋아하는데.’

어떤 끝이든 끝까지 가겠다고 레스에게 했던 말이 새삼 부끄러워졌다. 실제의 민하는 그렇게 당차지도 단단하지도 못했다.

‘그래도, 최선을 다해봐야지.’

그러고 있는데 시장이 찾아왔다.

아르곤에서 유명하다는 옥수수 구이를 잔뜩 가져와 일하던 사람들의 일에 찌든 표정을 식욕에 가득 찬 음험한 빛깔로 바꿔놓고는 거기 끼려는 민하에게 대화를 요청했다.

덕분에 은근히 시야의 사각지대에 있던 프란델이 성큼 걸어 나와 민하와 시장의 사이에 끼어들었다.

시장은 당연히 셋이 얘기하게 될 거라 생각했다는 얼굴이었지만, 당사자 둘은 그렇지 못했다.

‘어, 어색해……!’

말없이 가까이 앉아 있으려니 온갖 것들이 다 의식되었다. 눈치가 없는지 시장은 아무것도 모르는 얼굴로 말을 시작했다.

“별 필요 없는 정보일지도 모르지만, 집에 있는 걸 가져왔습니다.”

그것은 감정서처럼 보였다. 복잡한 문양으로 금테 두른 종이에 다양한 직인이 찍혀 있었다.

‘감정사 협회?’

내용을 읽어가던 민하는 멈칫했다. 그것은 감정서 딸린 예언이었다. 곧 칼라마린에 차원의 문이 열린다는 내용이었다.

“칼라마린이면 이 근처에 있는 도시네?”

어느새 깨어서 다가온 셰리카가 말했다. 민하도 그곳이 어디인지 알았다.

‘국경도시 칼라마린!’

고개를 들자 상황판이 보였다. 에상트 군이 점령했고 지금도 점령 중인 그 도시다. 며칠 뒤 그 도시 중앙에 문이 열린다는 예언이었다.

“잘됐다. 너무 늦어지면 민하가 곤란해질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가깝고 빠른 곳에 문이 열린다니 딱 좋잖아.”

셰리카가 말했고 프란델이 딱 잘라 말했다.

“안 돼. 이건 너무 위험해.”

민하는 한순간 생각했다. 곧 마음을 결정하고 말했다.

“좋은 기회라고 생각해요. 어차피 칼라마린은 되찾아야 하잖아요. 내가 함께 싸워서 칼라마린을 되찾고 문을 이용하면 되는 거잖아요.”

“그렇게 술술 풀릴 만큼 만만한 상대가 아냐. 포기해.”

프란델은 눈살을 찌푸린 채 감정서를 시장에게 돌려주었다. 민하가 말했다.

“해볼 만하잖아요? 그렇게 안 된다고 단정지을 것까진…….”

“바라크도 널 노렸어. 널 노리는 놈들에게 스스로 찾아가서 기회를 만들어주겠다고?”

“조금 위험하더라도 가야 돼요! 이거 아니면 다음 문은 한 달 뒤잖아요! 그때까지 기다릴 순 없다고요!”

민하가 소리쳤지만 프란델은 더 단단해질 뿐이었다. 이쪽을 보며 화를 누르는 듯한 말을 쏟아부었다.

“조금 위험? 그렇게밖에 안 보여? 페이란이 널 그렇게 따라붙는 게 실감이 안 나? 바라크가 널 내놓으라고 거래를 걸었던 게 기억 안 나? 전쟁은 조절할 수 없어! 거기 가서 무슨 일에 휩쓸릴지 다 예상할 수 없다고! 그런 자리에 널 내놓을 수 있을 것 같아?”

“날 내놓고 말고는 내가 정해요! 쉽게 생각할 일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충분히 알고 있다고요!”

“그러다 잘못되면!”

확 높아진 그의 목소리에 민하는 멈칫했다. 그는 머리를 거칠게 넘겼다. 미간을 좁힌 채 으르렁거리는 듯한 말을 이어나갔다.

“바라크가 네 능력에 대한 대책을 안 세웠을 것 같아? 한번 잘 먹혔다고 똑같이 당해줄 줄 알아? 그러다 네가 또 끌려가면! 다시 돌아올 수 없게 되면! 그런 건 각오할 수 없어!”

“누가 들으면 란델이 민하를 절절히 사랑하는 줄 알겠네요.”

쉬어빠진 목소리가 막 프란델의 말이 끝난 틈에 파고들듯 들려왔다. 셰리카가 눈을 새치름하게 뜬 채 테이블에 둘러앉은 사람들을 보고 있었다. 입꼬리를 올려 웃는 표정을 만들며 말을 계속했다.

“뭐 그렇게 절절해요? 민하의 일은 민하가 결정하는 거라고요. 란델이 거기 이래라저래라 할 권한 같은 건 없는 거 아니에요?”

프란델은 입을 다물었으나 침묵은 아주 짧았다. 태도를 바꾸지 않은 채 그 말에 대답했다.

“누구든, 내가 책임진 녀석이 위험한 일에 뛰어드는 걸 그냥 두고 볼 생각은 없어.”

“키스해줘요.”

난데없는 셰리카의 말에 그는 눈을 좁히며 그녀를 돌아보았다. 셰리카는 웃고 있었지만 화가 난 것처럼 보였다. 유리구슬 같은 눈동자로 프란델을 보며 말을 이었다.

“이제 그만 태도를 확실히 했으면 좋겠어요. 나는 민하를 좋아하는데, 란델이 자꾸 민하 민하 하니까 나 혼자 등신 되는 게 아닌가 싶어진다고요. 나는 뭐, 눈도 없고 판단력도 없는 사람인 줄 알았어요?”

“그건 이 대화가 끝나고 얘기하자.”

그가 말을 정리했으나 셰리카의 눈에 서린 열기는 더욱 또렷해졌다. 그런 눈으로 프란델을 바라보며 그녀가 말했다.

“키스에 시간이 얼마나 걸린다고 미뤄요? 시작하면 오전 내내 못 멈추고 끝까지 가게 될까 봐 그러는 건 아니죠?”

“셰리카.”

“그게 아니면, 민하 앞에서 키스하기가 무서워서 그러는 거예요? 정말로 민하가 너무나 신경 쓰여서 다른 일 핑계 대면서 피하는 거 아니냐고요!”

프란델은 살짝 굳은 얼굴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셰리카가 계속 외쳤다.

“나에게 키스해요, 지금! 민하가 보는 앞에서! 그렇게 하나하나 확실히 해두라고요!”

프란델은 한순간 더, 그대로 셰리카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얕은 숨을 뱉으며 말했다.

“그래.”

그래야지. 스스로에게 말하듯 반복한 그가 고개를 숙였다. 도발하듯 말한 셰리카는 정작 그가 가까워지자 긴장한 듯 눈을 꼭 감았다.

하지 마!

민하는 자신도 모르게 외칠 뻔하다가 입을 꽉 다물었다.

이게 맞는 거였다. 이미 결심한 일이었다. 두 사람이 가까워지길 박수 쳐야 할 마당에 방해해서는 안 되었다.

그러나, 어깨가 뻣뻣해졌다. 주먹이 꽉 조여들었다.

싫어.

아무리 밀어내도 거부감은 점점 더 선명해졌다. 뻣뻣하게 굳어가는 민하의 앞에 프란델이, 셰리카가 있었다. 코가 맞닿을 듯 셰리카의 앞에 가까워진 프란델은 입술을 맞대기 위해 고개를 기울였다.

더 보고 있다가는 비명이 튀어나갈 것 같아 민하는 고개를 돌렸다. 웃는 얼굴로 지켜봐야 한다고 생각했다. 외면하거나 도망쳐서는 어색하다고 생각했다. 그 생각들은 지금 이 순간 아무 의미가 없었다. 울컥하고 목이 뜨거워져서 필사적으로 딴생각을 했다. 그래도 온 신경이 저쪽에 쏠리는 것을 느끼면서 그 와중에 민하는 간신히 떠올려야 할 생각을 끄집어냈다.

선배.

선배의 얼굴을 생각했다. 선배를 생각해야 한다는 사실을 생각해내는 데 이만큼의 시간이 걸렸다. 생각하지 않겠다 마음먹었을 땐 끝없이 생각나던 선배의 모습들이 이제는 일부러 끄집어내어야 하는 모습이 되어버린 것만 같았다.

그때였다.

문밖이 소란스러워졌다.

순간 민하는 반사적으로 프란델 쪽을 돌아보았다. 왜 소리가 난 쪽이 아니라 그쪽을 돌아보게 되었는지 스스로 이해할 수 없었지만, 왜인지 알 것 같은 기분도 들었다.

프란델과 눈이 딱 마주쳤다. 그 또한 소리가 난 쪽 대신 민하 쪽을 바라봤기 때문이다.

그가 눈살을 찌푸린 채 고개를 들었다. 그 시선이 민하에게 계속 꽂혀 있음을 모두가 알아볼 것만 같았다.

‘안 돼.’

순간 민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도망쳐야 했다. 이대로는 허물어지는 표정을 숨길 수가 없었다. 도망쳐서 얼굴을 보이지 않을 자리로 가버려야만 했다.

그런 민하의 등에 프란델의 목소리가 꽂혔다.

“잠깐, 서민하!”

민하는 뛰었다. 문밖의 소리는 사람들끼리 싸우는 소리였다. 문을 향해 달려가는 기사들 속에 섞이려고 힘껏 달아났다.

그래봐야 사실은 알고 있었다.

금세 쫓아온 프란델이 민하의 팔을 붙잡았다. 프란델이 따라오는 속도를 민하가 이길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대로 붙잡혀 뒤돌려지면서 민하는 자신이 붙잡히길 바랐다는 것 또한 알았다. 멋대로 움직이는 마음이 점점 더 무서워졌다.

프란델도 정리되지 않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생각할 겨를도 없이 일단 붙잡은 듯 그는 한순간 그저 민하를 바라보았다. 그 얼굴이, 당혹감과 당황이 뒤섞인 채로도 자신을 어쩌지 못하고 이쪽을 바라보는 눈빛이 진심을 의미하는 것 같아서 민하는 그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너……!”

그때 문이 열렸다. 싸우는 소리가 현실감을 갖추고 쏟아져 들어왔다.

“또 민하를 쫓아가는 거예요? 날 두고?”

셰리카의 목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뒤편에 선 셰리카는 굳은 채로 굳어지지 않으려고 애쓰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조금 전 그들의 키스를 눈앞에 둔 민하가 저런 표정이었을 터였다.

‘이래선 안 돼!’

민하는 그를 뿌리쳤다. 놔주지 않으려는 그를 권능으로 밀쳤다. 그가 밀려나는 것을 끝까지 보지도 못한 채 앞을 향해 달아났다.

앞쪽에는 소란의 원인이 있었다. 당황한 나머지 있는 힘껏 달아나던 민하는 앞쪽에서 다가오는 사람을 향해 와락 안겨들어버렸다.

그는 팔 벌려 민하를 받아 안아주었다. 속도 조절을 못 한 민하가 거의 들이받듯 달려들었는데도 별로 흔들리지도 않고 단단히 안아주었다.

사근사근한 목소리가 민하의 귓가에 파고들었다.

“열렬한 환영이라니, 기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