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하니까요.”

피가 섞이지 않은 오라비의 배신.

그리고 죽음의 위기에 처한 미사를 구한 것은 정체를 알 수 없는 남자, 태성.

회색빛 눈을 지닌 그의 정체는 무엇일까?

기싸움이라도 하듯이 서로를 마주 보는 시간이 길어졌다. 어둠에도 익숙한 눈이라는 건 이래서 불편하다. 검은 장막을 엄폐물 삼아 시선을 돌리거나 피하는 것조차 불가능했다.

“무력해요. 미사가 나한테 너무 많은 걸 느끼게 해요.”

“…….”

“지켜주고 싶은 생각이 들다가도, 내가 정말 무력한 것처럼 느껴져서 짜증 나.”

2. 작가 소개

신여리

무더운 7월에 태어나서인지 겨울을 싫어합니다.

몹시 게으르지만 글쓰기만큼은 부지런히, 즐겁게 하고 있습니다.

오래 기억에 남는 이야기를 쓰고 싶습니다. 읽어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e-mail▶shinyeori@naver.com

▣ 출간작

물의 자흔을 쫓는다

바라연

수라화

가시나무 우는 성 1부

마리포사 mariposa

3. 차례

Part 1

#20. 과리

#21. 상태이상

#22. 혼자이기 싫은 날

#23. 꿈

#24. 그리고 시작

#25. 추격

4. 미리 보기

그날 이후로 태성은 눈에 띄게 불안해했다.

“미사 씨, 혹시 모르니까 커튼도 꼭 치고 있고요. 이상한 낌새 느껴지면 바로 전화하고요. 밖에 나갈 거면 그래도 전화하고…….”

“너야말로 조심해. 네 학교 근처였잖아.”

태성에 비하면 미사는 비교적 빠르게 정신을 차린 편이다. 무슨 일이 있었을 거라면 그날 밤에 있었을 것이다. 그 ‘괴이한 기운’의 일족과 그들의 거리는 건물의 벽 하나가 전부였다. 그 정도의 존재감을 지닌 자가 도망치는 그들을 추격하지 못했을 거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태성도 그에 관하여는 동감하는 듯했지만 마음을 놓지 못했다.

“괜찮아. 난 차라리 네가 학교를 안 갔으면 좋겠는데.”

“시험기간이라서요.”

보통 때도 아니고 기말고사 시즌이다.

미사도 더 고집하지는 않았다. 태성은 학교생활에 꽤 큰 의미를 두고 있었고 의외로 고집스러운 구석이 있었다.

“별일 없을 테니까 가봐.”

태성의 어깨를 툭툭 두드려 떠밀었다.

“전화, 하면 받아요.”

“그래.”

미사는 태성의 태도에 묘하게 속이 따뜻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분명 보호받아야 하는 사람은 태성 쪽인데도 미사는 때때로 그에게서 보호를 받는 기분을 느꼈다.

사준이 그녀의 주위를 맴돌며 챙겨주었을 때가 떠올라 속이 급속도로 식을 때도 있지만, 태성의 진심은 사준의 시커먼 속보다 훨씬 투명했다. 하긴 누굴 가져다대도 사준보다는 나을 거다.

그날도 마찬가지였다. 바짝 얼어붙은 그녀를 잊지 않고 챙긴 건 태성이었다. 극도의 불안감에 시달리면서도 그녀의 손을 놓지 않고 앞장서 걷던 뒷모습이 생각보다 오래 기억에 남았다.

‘정말 그건 누구였을까.’

용운과는 여전히 연락이 닿지 않는다. 확인할 길이 없으니 답 없는 고민만 계속할 뿐이었다. 이쯤 되니 미사는 정말 그게 용운이었고, 자신이 과민해 오해를 해서 도망쳤던 건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했다. 하지만 용운이라면 그렇게 무서운 느낌일 리가 없는데.

방문객이 초인종을 누른 건 그로부터 한 시간쯤 후였다.

딩동.

설거지를 하고 막 수건에 손을 닦고 있을 무렵이었다.

‘뭐 놓고 갔나?’

“태성이야?”

무심코 현관으로 다가가던 미사가 멈춰 섰다. 문틈으로부터 기묘한 기운이 느껴졌다. 불길한 예감이라 해도 옳았다.

현관문 렌즈를 통해 바깥을 내다보는 미사의 안색이 창백하게 질렸다.

마치 그녀가 보고 있다는 것을 아는 것처럼, 뒷짐을 진 붉은 머리칼의 남자가 흰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안녕?”

괜찮을 거라고 아무리 위로를 하더라도, 좋지 않은 예감은 언제나 들어맞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