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짓 속에 품어 왔던 단 하나의 진실.

다분히 의도적인 접근이었다. 그와의 첫 만남과 결혼까지. 그의 부친에게 처음 부탁을 받았을 때, 내키진 않았지만 그게 최선이라는 생각이 들어 승낙했다. 하지만 과분한 행복과 새로운 충만함, 그것들이 커져 갈수록 죄책감도 함께 커져 갔다. 하여 진실이 드러난 뒤, 사랑하는 그에게 버림받았을 때 그 고통은 응당 치러야 할 대가라 생각했다. 그렇게 헤어진 지 5년. 내가 일하는 음식점에 우연히 찾아온 그를 본 순간, 난 숨을 쉴 수 없었다. 전혀 준비되지 않은 재회였으므로. 그리고 그의 곁에 있는 한 여자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으므로….

▶잠깐 맛보기

“더 필요하신 것 있으시면 언제든지 아래의 벨을 눌러…….”

눅눅한 공기 탓에 낮지만 그녀의 청아한 목소리가 더욱 선명했다. 습관처럼 익은 미소를 띠우며 손님과 눈을 마주치던 서현이 하마터면 비명을 지를 뻔했다.

‘이건…… 아니야……’

그녀가 도리질을 했다. 신이 존재한다면 죽는 날까지 이런 날만은 오지 않게 해 달라고 간절히 기도했었다. 비록 가진 거라곤 빈 몸뚱이가 전부지만 그녀에게도 자존심은 있었다. 살다 보면 뜻하지 않게 마주칠 날이 있겠지만 최소한 이런 식은 아니었다.

충격을 받기는 지혁도 마찬가지였다. 지혁은 이를 갈며 어서 이 환각상태에서 벗어나려 했다. 자신이 저지른 추악한 행동 따윈 아랑곳하지 않고 이혼하는 마지막 순간까지 당당히 위자료를 요구했던 여자였다. 그러나 그가 발버둥 치면 칠수록 서현의 모습은 더욱 더 뚜렷해지기만 했다. 툭 건드리기만 해도 눈물이 떨어질 것 같은 커다란 눈으로 아기 새처럼 떨고 있는 서현의 모습은 꿈이 아닌 현실이었다.

“자기, 혹시 저 여자랑 아는 사이야?”

경주가 한껏 목소리를 낮추고 서현을 가리켰다. 그러자 지혁이 주변의 사람들은 물론 죽을힘을 다해 그 자리를 벗어나는 서현의 귀에까지 들리도록 큰 소리를 내며 빈정거렸다.

“뭐? 내가 데리고 놀 여자가 없어서 저런 여잘 데리고 놀다 버리겠어?”

너덜너덜 만신창이가 된 서현의 몸이 무거운 추가 달린 발걸음에 이끌려 겨우겨우 움직였다. 고통스러움을 이겨 내기 위해 서현이 눈을 꼭 감고 마른 숨을 삼켰다. 심장이 활활 타 버릴 것처럼 고통스럽게 옥죄었다.

〈자기, 혹시 저 여자랑 아는 사이야?〉

서현이 입술을 잘근 깨물며 하얗다 못해 푸른 심줄이 투명하게 비치는 가느다란 팔목에 힘을 꽉 주었다.

‘이러지 마, 한서현. 잊었니? 이럴 거였으면 처음부터 저 사람한테 매달려서 애원했어야지. 눈앞에서 네가 죽어 나간다고 해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을 저 사람에게 구걸하듯 용서를 구했어야지!’

눈물 대신 우수수 쏟아지듯 흘러내린 앞머리를 핀으로 단단하게 고정시키며 서현이 쓰디쓴 약을 넘기 듯 마른침을 삼켰다.

▶목차

1~18

* 이 전자책은 2006년 타출판사에서 출간된 〈그 후〉를 eBook으로 제작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