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느 때라면 록세나 드루 같은 숙녀가, 지주가 국외에 나가고 없다 해서 남의 땅을 함부로 밟고 지나가는 일은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발바닥에 물집이 잡힌 처지라 모어랜드 파크의 풀밭이 더없이 반가워 보였다. 구두와 양말을 벗어 던지고 들판을 가로질러 간다면 집으로 돌아가는 길을 5킬로미터는 절약할 수 있을 터였다.
「새 신발을 신는 건 정말 바보 같은 짓이야.」
중얼거리며 숲 가장자리에 있는 나무 그루터기에 걸터앉은 그녀는, 강물처럼 물결치는 풀밭으로 시선을 던진 채 발바닥을 문지르며 생각에 잠겼다. 가운데 넓적한 바위가 있고, 그 너머로 드넓은 목장이 이어지고 있었다. 허리춤에 달려 있는 시계를 짤깍 열어 보았다. 아침 일곱 시. 지금쯤 헬렌과 필리시티는 서로 마주 웅크린 채 곯아떨어져 있을 테고, 잠에서 깨어난 매기 왓슨은 차를 만들 채비를 하고 있으리라.
9월인데도 여태 꽃을 피우고 있는 들장미 향기를 만끽하며, 록세나는 바람 냄새를 들이마셨다. 그 향기 너머 어디에선가 쌉쌀한 바다 내음이 감도는 듯하다. 바닷가 모래언덕을 떠올리며 그녀는 두 눈을 감았다. 맨발로 모래 위를 거니는 것은 얼마나 멋진 일인가. 울적한 봄과 변덕스런 여름을 지나는 동안 헬렌은 스카버로우의 바다에 가고 싶다고 졸랐는데. 내년 여름이 머지 않았으니 그때는 한 번 데리고 가리라. 겨울이 다가오는 지금, 바닷가에 가겠다는 계획이 그렇게 다시 마음속에 들어서고 있었다.
록세나는 구두와 양말을 벗고, 이슬 머금은 풀밭 위에 발을 뻗었다. 옛날에는 참 많이도 걸어다녔지. 그 자리에 편안하게 앉아 일어날 생각도 하지 않은 채, 록세나는 생각에 빠져들었다. 얼굴에 살며시 미소가 떠올랐다. 그이는 무척이나 걷기를 좋아했어. 이제는 남편을 떠올리면서도 웃을 수 있게 되어 고마웠다. 첫 아이를 가졌을 때도 그는 아내에게 교구 주변을 산책해야 한다며 부드러우면서도 위협적인 어조로 우겨대곤 했다. 배가 불러와 몸이 무거워졌는데도 그 고집은 꺾일 줄을 몰랐다. 이러다가 가로수 밑에서 아이를 낳게 될지도 모른다고 록세나가 불평을 해도 그저 웃기만 했고, 침실에서 무사히 헬렌을 낳았을 때도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
록세나는 허리를 앞으로 구부려 손으로 턱을 괴었다.
「앤서니, 당신 말은 늘 옳았어요.」
록세나의 눈에 이슬이 맺혔지만, 남편의 무덤에 흙이 채 마르지 않았던 지난 4, 5월과는 달리 금방 사라졌다.
둘째를 임신했을 때도 록세나와 남편은 산책하는 습관을 꾸준히 지켜나갔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 남편은 큰 나무 아래 앉아 쉬고 있는 그녀에게 의사가 한 말을 전했다. 그때 차분히 그녀를 바라보며 말하던 남편의 얼굴은 평생 잊혀지지 않을 것이다.
「오진이 아니라면, 여보, 난 내년 여름까지도 살 수 없대.」
그러나 다음해 여름에도 그는 살아 있었다. 그 다음 여름도 무사히 넘겼다. 둘째 딸 필리시티가 걸음마를 시작하는 것도 병석에 누워 지켜볼 수 있었다. 필리시티가 ‘아빠’하고 부르면서 그의 침대에 기어올라가 옆에 앉을 때쯤에는 형편없이 야위어 있었다. 필리시티가 네 살이 거의 다 되고 헬렌이 여섯 살 되던 해, 남편은 평소처럼 조용히 눈을 감았다.
이제 겨우 희미하게 퇴색해 가는 슬픔 속에서, 록세나는 그토록 오래도록 죽음과 싸울 수 있었던 목사의 강인함에 대해 의사가 놀라워했던 일이 떠올랐다. 그이가 얼마나 강한 사람인지 이제는 모르는 사람이 없을 거야. 눈앞에 펼쳐진 목장을 바라보면서 그녀는 생각했다. 겉보기에는 당신이 조용하고 남의 눈에 띄지 않는 나약한 사람처럼 보일지 몰라도 정신은 꺼질 줄 모르는 불길처럼 타오르고 있었죠. 열성을 다해 간호하기도 했지만, 끊임없이 기도한 덕분이었어요. 지금 같은 이성의 시대에 사는 사람들은 대부분 그저 미신이라고 치부해버릴 테지만 말이에요.
지루하고 음울한 겨울 내내, 서서히 숨이 다해 가는 남편의 모습을 지켜보면서 록세나는 다짐했었다. 병실을 벗어나면 다시 신선한 공기를 마시면서 긴 산책을 하겠노라고. 끝내 남편이 그녀의 팔에 안겨 마지막 숨을 몰아쉬었을 때는 슬픔과 함께 안도감이 느껴졌다. 위트콤의 교구 목사, 앤서니 드루는 세상과 작별하여 사랑하는 아내가 남편 없이도 잘 살아가는지를 지켜볼 때가 된 것이었다.
처음에 록세나는 위트콤 마을의 언저리에서 2, 3킬로미터 정도만 가볍게 산책을 했었다. 혼자 걷고 있는 그녀를 본 교구민들은 마차나 달구지를 세우고는 태워다주마 고집을 피워대곤 했다. 늘 그랬다. 그저 정처 없이 걷고 있노라는 말을 할 수가 없었던 록세나는 옷이나 식료품을 사러 가는 중이라고 둘러댈 수밖에 없었다.
말을 지어내는 데도 한계가 있었기 때문에, 결국 록세나는 들판을 가로질러 가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하는 편이 원치 않는 호의나 동정을 베풀어주려는 마을사람들과 마주칠 위험이 적을 듯했다. 눈이 오나 비가 오나, 록세나는 곤히 자는 아이들을 한 번씩 들여다보고는 기분 좋을 만큼 피곤해질 때까지 걷다가 돌아오곤 했다. 신발이 닳아서 새 것으로 사 신었는데, 지금 그것 때문에 발바닥에 커다랗게 물집이 잡혀 너무 아팠다.
「새 신발은 언제나 말썽을 부린다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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