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작품 소개

“그러니까……, 앞으로 한 달만 나와 있어준다면 뭐든 네 부탁을 들어줄게.”

스무 살 대학생 정하연, 그는 돈을 융통하기 위해 아버지의 오랜 지인이었던 박정우를 찾아가고 그에게서 그 대가로 삼십 일간 자신과 함께 지내자는 제안을 받는다. 한 달, 그 길고도 짧은 기간 한집에서 살게 된 하연과 정우 두 사람에게는 어떤 일이 일어날까?

“사람의 마음을 하나 얻는 데…… 얼마의 값을 지불해야 하는 걸까.”

박정우가 혼잣말 하듯 중얼거렸다. 고개를 돌리자 그는 답을 해달라는 듯 하연을 바라보고 있었다.

“얼마를 들여야…… 가질 수 있는 거야?”

2. 작가 소개

달리다

많이 읽고 조금 씁니다.

트위터 : @dalida070111

3. 차례

#Prologue

#D-30

#D-20

#D-15

#D-14

#D-6

#The night before

#D-day

#Epilogue

4. 미리 보기

커피를 마시느라 고개를 기울인 사이 그의 시선이 정수리에 닿는 것이 느껴졌다. 하연은 이곳에 온 목적을 상기하며 쥐고 있던 잔을 내려놓았다. 곧장 코트 주머니에 넣어두었던 편지봉투를 꺼냈다.

아아, 그 내용을 짐작한 박정우가 낮게 신음했다. 그가 저를 향해 손을 뻗자 하연은 긴장해 몸을 굳혔다.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하나 곤란해하기도 전에 박정우가 봉투를 거둬갔다. 곧장 봉투를 연 그는 안에 든 문서들을 확인하며 언짢은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 그는 곧고 진한 눈썹을 단박에 구기며 쯧, 작게 혀를 찼다. 지켜보던 하연도 덩달아 미간을 구기고 말았다. 하연은 봉투를 열어보지 않았으나 그 내용은 짐작하고 있었다.

아마도 돈을 빌리기 위한 서류와 간청하는 편지가 들어 있을 것이다. 이 봉투를 하연에게 쥐여준 작은아버지는 이제껏 고아가 된 그를 거두어 키워주었기에, 하연은 이 심부름을 거절할 수 없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그 빈자리를 동생인 작은아버지가 채웠다. 아버지와 함께 살던 집, 사업 그 모든 것을 작은아버지가 차지했다. 아버지는 인테리어 회사를 운영하고 있었다. 하연이 알기에 박정우는 아버지가 사업상 만나던 많은 사람들 중 하나일 뿐이었다. 그는 어쩌다 아버지의 사무실이 아닌 집으로 찾아오기도 했지만, 그마저도 짧기만 한 방문이었다.

옛 지인의 아들이 불쑥 찾아와 큰돈을 빌려달라니 그에게는 황당할 노릇일 것이다. 그가 달가워하지 않을 거란 건 예상했으나, 노골적으로 인상을 구기는 그를 보자 불안해 울렁거리던 속이 시큰하게 아팠다.

“어린애한테 이런 일을 시키다니……. 한심하네.”

입을 굳게 다물고 있던 박정우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비난의 화살이 자신을 비켜가자 왠지 눈물이 날 것 같다. 그럴수록 하연은 의연한 얼굴을 가장했다.

“어린애라뇨. 저도 이제 성인인걸요.”

“그랬지. 대학은 잘 다니고 있어?”

하연의 능청스러운 대답에 박정우가 인상을 풀었다. 그에게서 대학 이야기가 나오자 하연에게는 어떤 기대가 생겨났다. 하연은 “네.” 대답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박정우는 더 이상 볼일이 없다는 듯 하연이 가져온 편지를 접어 툭 테이블에 던져놓았다. 무심해 보이는 그의 얼굴은 어딘가 화난 것 같기도 했다. 처음부터 부탁할 곳을 잘못 찾아온 것이다. 그만 자리에서 일어나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하연은 그에게 건넬 작별인사를 쉽게 떠올리지 못했다.

하연이 머뭇거리는 사이 박정우가 흘끔 벽에 걸린 시계를 확인했다. 더 이상 시간을 빼앗으면 안 된다는 생각에, 하연이 자리에서 일어나려 할 때였다. 그가 마치 붙잡으려는 것처럼 말을 꺼냈다.

“돈은 빌려줄게.”

하연이 놀란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박정우의 깊고 진한 눈은 그의 감정들을 유려하게 숨기고 있었다.

“단, 네 작은아버지의 앞으론 내줄 수 없어.”

“그럼,”

“알고 있을지 모르겠지만, 네 작은아버지의 사업체는 이미 손쓸 수 없는 지경까지 와버렸어. 무리하게 공장을 돌려서 재고만 늘리느니 차라리 문을 닫는 게 나아. 거래처에 남발한 어음도 위험 수위를 넘어섰고.”

하연은 그의 말을 알아들었다. 작은아버지는 하연의 부친이 운영해왔던 인테리어 시공업체를 넘겨받았지만, 건축설계나 인테리어 쪽에는 문외한이었다. 그는 디자인 사무실은 남에게 맡기고 인테리어 자재를 생산하는 일로 손을 뻗었다. 얼마간은 잘되는 것처럼 보였으나 저렴한 중국산 자재에 밀려 사업은 순탄치 않았다. 그럴수록 무리하게 공장 규모를 키워나가던 작은아버지의 사업방식을, 어린 하연조차 답답하게 생각했을 정도다.

부끄러운 치부를 들켜버린 기분에 하연은 박정우가 왜 작은 아버지의 사정을 그리 속속들이 알고 있는지까지엔 생각이 미치지 못했다. 하연은 지금 상황이 버겁기만 해 고개를 숙였다. 그의 시선이 잠시 제게 머무르는 것이 느껴졌다. 이내 그의 낮은 목소리가 느릿하게 이어졌다.

“정하연, 네 이름으로 돈을 빌린다면 가능하겠지.”

놀란 하연이 다시 그를 바라보았다. 박정우는 여전히 표정 없는 얼굴로 하연을 바라보고 있었다. 처한 입장은 물론이고, 연륜이나 갖고 있는 모든 것이 우위에 있는 자의 여유였다. 하연은 처분을 기다리는 죄인이 된 기분으로 조용히 그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그렇지만 몇백만 원도 아니고…… 잠시 보살펴준 사람을 위해 사회에 발 딛지도 않은 네가 떠안기에는 리스크가 큰 금액이야.”

그는 하연의 작은아버지 내외를 ‘잠시 보살펴준 사람’이라 칭하며 냉정해지라 말하고 있었다.

“제 이름으로도 가능하다면…… 도와주세요.”

하연이 내 닫고 있던 입을 열어 담담히 대답했다. 작은아버지를 위해 희생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그러나 그렇게 대답해야했다. 하연은 그에게만은 제가 인정머리 없고 은혜를 모르는 인간으로 비치는 게 싫었다. 그의 제안은 정하연이란 인간의 성질이 어떠한지, 어디까지 할 수 있을지 시험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며 하연을 바라보던 박정우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가 마치 나무라는 것만 같아 하연은 제 말이 건방지게 들렸을까 걱정하면서도 마음을 바꿀 생각은 없었다.

박정우는 그 마음을 읽은 듯 “어쩐다…….” 중얼거리며 잠시 말을 골랐다.

“대신 나도 부탁 하나 해도 될까?”

“네. 뭐든 할게요.”

하연의 절박한 대답에 박정우가 무심해 보이던 얼굴을 무너트리며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겨우 이 정도 일에 그런 심각한 얼굴 할 것 없어.”

그리 말하는 박정우에게서 승자의 오만함을 엿본 것만 같았다. ‘겨우’라는 단어 하나로 이 버거운 상황이 그의 짓궂은 장난처럼 느껴졌다. 홧홧하게 머리로 열이 오르는 기분이었다. 그럴수록 하연은 얼굴을 붉히기보다 피하지 않고 그를 마주 보았다. 그에게 어린애 취급을 받고 싶지 않았다.

하연이 깜박 눈을 감았다가 뜨며 거리낌 없이 눈을 맞추자 순간 박정우는 웃음을 거두었다. 잠깐의 침묵이 이어지며 뭔가를 가늠해보던 박정우가 책상이 놓인 왼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의 시선을 좇자 책상 위에 놓인 탁상용 달력이 눈에 띄었다.

“삼십 일만…….”

낮은 그의 목소리에 설핏 초조함이 스친 듯했다. 그가 잠시 마른침을 삼키자 목울대가 크게 움직여 하연의 긴장을 부추겼다.

“나를 따라갈래?”

“네……?”

하연은 그 뜻 모를 말에 놀라 눈을 치켜떴다.

장난 같은 그의 말은 전에도 들은 적이 있었다. 하연은 곧 오래된 기억을 떠올렸다. 그리고 제 손을 잡아주던 커다란 손의 감촉을 기억해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고인이 남기고 간 사업과 재산, 빚을 두고 어른들 사이에서는 계산이 오갔다. 그 쑥덕거림 속에서 제게 향하던 차가운 시선을 눈치 빠르게 읽어냈던 하연은 순수하게 슬퍼할 수 없는 자신이 부끄러웠다. 친모를 알지 못했지만, 하연은 그 빈자리를 느끼지 못할 만큼 아버지로부터 넘치는 애정을 받았다. 개인 사업을 했던 아버지는 일찍부터 하연에게 어른의 세계를 경험시켜주었다. 아버지의 곁은 늘 사람들로 넘쳐났고 하연은 어른들 속에 섞여 있는 시간이 많았다. 그 시절 하연은 조숙한, 다른 말로는 건방진 소년이었다.

그러나 하연은 아버지의 죽음 앞에서 처음으로 자신이 너무 어리고 어른들의 세계는 알고 있던 것과는 전혀 다르다는 것을 깨달았다. 뭐 하나 부족할 것 없던 물질적 풍요와 늘 제게 사랑을 주던 가족과 사람들……. 그 모든 것이 당연히 제 것이라 믿었다.

「애는 엄마가 키워야지.」

뒤에서 들려온 그 말에 하연은 발 딛고 서 있던 땅이 그대로 무너져버리는 것만 같았다. 철없이 울고만 있기에는 영악했으나 스스로를 지키기에는 너무 어렸다. 장례식장 한쪽에서 하얗게 질려 떨고 있는 하연의 손을 그가 달래듯 붙들었다.

「나를 따라갈래?」

박정우는 버겁기만 한 그때의 상황과는 정반대로 같이 놀러가자는 듯 가볍게 말을 건넸다. 표정 없는 메마른 얼굴을 하고 있던 그는 아직 눈가가 붉어 울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거짓말 같은 현실에서 오직 그만 진실이라 믿고 싶었다. 가식적인 사람들 속에서 그만 제 편이라는 착각이 들었다. 그때 하연이 조금만 더 어리거나 어수룩했다면 그 손에 매달려 떼를 썼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하연은 붙잡아주던 그의 손을 먼저 놓았다.

말없이 멍하니 지난 기억을 더듬고 있는 하연에게 박정우가 변명하듯 이어 말했다.

“그러니까……. 앞으로 한 달만 나와 있어준다면 뭐든 네 부탁을 들어줄게.”

“왜…… 그런…….”

하연은 채 말을 끝맺지 못하고 그를 바라보았다. 정우는 여전히 그 속을 알 수 없는 얼굴을 하고 하연과 눈을 마주쳤다. 하연이 물끄러미 보고만 있자 그는 대답을 피할 수 없어 작게 한숨을 내쉰다.

“외로운 늙은이의 말상대 정도로 해두면…… 답이 되려나.”

그는 늙은이라고 하기에는 젊고 수려한 얼굴로 미소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