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작품 소개

나는 열여섯의 로잘리테가 되었다.

침대에서 굴러떨어지고 눈을 떴더니 고전, 막장, 피폐, 치정, 환장의 BL소설 ‘푸른 별밤의 아스테리온’에 빙의했다. 그것도 인생 막다른 길에 다다라 자살하는 남자주인공 아스테리온의 누나 로잘리테로.

스토리의 흐름에 몸을 맡기고 결말에 이르렀는데 그 순간, 로잘리테에 빙의했던 열여섯 살로 돌아와 있었다. 

이게 정답이 아닌 것 같았기에 동생을 곱게 키워봤다, 이번엔 외부요인으로 사망했고 로잘리테는 다시 회귀했다.

방향을 바꿔봤다. 동생이 아니라 자신에게 몰두하고 단련했다.

이것도 아닌 것 같다. 마법을 배우다가도 회귀했고, 마탑 졸업논문 완성 파티를 하다가도 회귀했다.

끝없이 열여섯으로 돌아오는 로잘리테 록스버그, 나는 곱게 죽을 방법을 찾고 있다.

2. 작가 소개

몰포

3. 차례

#외전 : 근무시간은 길어 걸어라 아저씨야

#외전 : 초속 5km

#외전 : 엘피움 록스버그의 우울

4. 미리 보기

한 건 하고 저택으로 돌아가자, 저녁 식탁에서 록스버그라는 성을 단 인간들은 모조리 날 핍박했다. 공직에 있는 놈들이 짠 월급에 한두 푼 정도 해먹을 수도 있는 거지, 그걸 왜 굳이 들춰내서 일을 만들어내느냐 탐관오리 같은 소릴 했다.

내가 다 생각이 있다 여유를 부리자, 선대와 현 공작이 아르릉 짖기를 멈추고 내게 물었다.

“얼토당토않은 소릴 한다면, 일하는 김에 자네 장난감 구입 예산을 다시 짜도록 하겠네.”

“난 괜찮습니다 루시루시. 슬슬 염병 터트릴 때 됐다 싶었지요.”

정말 그렇게 생각한다면 구둣발로 내 엄지발가락을 꼭 집어 밟는 건 그만두지 그래. 나 지금 실내화라 아파.

“로즈로즈. 내가 많이 아프네만.”

“아이고 세상에 어째. 왜 갑자기 아프다 소리지? 나이 먹어서 골병든 거 아닙니까 루시루시?”

하하하하 나중에 두고 보자 로즈로즈.

난 아랫입술을 악문 다음 은근한 목소리로 말했다. 과연 내 말이 끝나고 나서도, 그대들이 날 핍박할 수 있을까?

“데스크업무가 가능한 록스버그 가신 하나쯤, 집에 두고 살면 좋을 거 같지 않나?”

로즈로즈의 모친이 방금 전까지 숫돌로 싹싹 갈고 있던 나이프를 테이블에 다소곳이 내려놓았다. 로즈로즈는 슬그머니 발을 치우더니, 자기 원피스 자락으로 내 실내화를 싹싹 닦고 바이올렛에게 바르는 연고 가져와라 소리쳤다.

“난 자네를 믿고 있었네 루시루시. 그 굴러다니는 장난감 맘껏 사게.”

“언젠 시끄럽다고 싫어하지 않았습니까.”

“아냐, 아침에 알람 되고 좋아.”

어쩜 이렇게 능청맞게 웃는 얼굴이 로즈로즈랑 빼다 박은 거지. 나중에 에리나 유디도 저렇게 되는 건 아니겠지? 상상도 하기 싫다.

내가 재개발구역으로 돌연 이사한 사람들 리스트 뽑고, 커넥션 캐내고, 행정센터장과 록스버그 부녀를 들들 볶은 것은 다름 아니라 그 드릴의 아버지인 아므람 앰버라는 놈 때문이었다.

이 새끼가 완전 인물이었다. 게다가 선대 에디이가 앞으로 이곳에서 일할 날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일손이 늘면 내게도 좋은 일이 아닌가. 로즈로즈가 노는 날이 많아질수록 궁에서 함께 있을 시간도 많아질 테니.

“아므람 앰버라는 자가 치안청에서 해먹은 돈으로, 귀족 작위도 살 수 있겠더군.”

내가 조곤조곤 빼돌린 비품을 인맥을 통해 팔아치우고 세를 넓힌 솜씨와, 치밀한 이중장부를 작성하는 회계 재주와, 단 한 번의 무단결근과 지각과 조퇴도 없이 근속 10년을 채운 앰버 주임의 성실함을 말해주자, 에디이와 로즈로즈가 똑같은 표정으로 입을 틀어막더니 희열로 눈물까지 찔끔 흘렸다.

뭐 저런 인간들이 다 있지. 솔직히 징그러웠다.

“재주도 좋군. 예산이라곤 참새 눈물만큼 나오는 치안청에서 말야.”

“그러게 말입니다. 귀족이 그렇게 좋은 모양이니 작위 하나쯤은 줘야겠지요?”

“그러고 보니 브라운이 우리 집안에서 오래 일했지.”

“브라운 준남작이라니, 어감이 좋습니다.”

“앰버 경은 부디 흰 대리석 집을 선호했으면 좋겠군.”

“거래 재료는요?”

“여분이 있다. 라이오스 퇴위 선물로 받아 오마.”

저자는 어떻게, 일국의 왕을 협박할 소재가 털어도 털어도 계속 나오지? 지난 6년 이런 광경을 몇 차례나 봐와서 소름이 다 끼쳤다.

처음 한두 번은 과연 선대 록스버그 공작이다 감탄했으나, 이게 열 번을 넘어가니 저게 사람인지 악의라는 개념에 인간의 껍데기를 뒤집어씌운 무언가인지 헷갈릴 지경이었다.

“너무 좋아, 너무 좋아요 루시루시. 그렇잖아도 크롤리 영감탱이 전화국에서 나오질 않아서 일손 부족했는데. 뭐 가지고 싶어요? 새 보석나무 심어줄까?”

로즈로즈, 자넨 애정을 물질로 보상하려는 심리가 너무 강해. 사람이 돈만 가지고 살 수 있는 게 아닌데 말이야. 나보다 더한 사람을 만나서 내 문제점을 깨닫게 될 줄은, 순순히 반겨야 할 일인지 억울해야 할 일인지 원.

“……!”

로즈로즈가 날 안고 정수리부터 시작해 온 얼굴에 뽀뽀하고 있는데, 가젤이 에리의 손을 잡고 절뚝거리며 식당에 들어서더니 록스버그 공작을 외쳤다. 볼을 빵빵하게 부풀리고 나 화났다 주장하는 가젤에게 로즈로즈가 밥 먹다 말고 후다닥 일어나 뛰어갔고, 에리는 냉정하게 가젤의 손을 뿌리치더니 내게 달려와 안아달라고 보챘다.

“그래그래, 넌 아직도 푹신푹신을 좋아하는구나.”

마리랑 리리는 푹신푹신 졸업했는데 얜 왜 아직 이러는 거지? 록스버그 핏줄이 강해서 그런가? 마리와 리리가 비교적 날 닮은 데 비해 에리는 작은 로즈로즈라 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라서 이상할 것까진 없는데…….

“공자도 기뻐하게! 글쎄 루시루시가 말일세!”

로즈로즈가 지금까지의 이야기를 가젤에게 전하자, 이 초식동물이 록스버그 부녀와 비슷한 느낌으로 환하게 웃더니 눈물을 찔끔 흘렸다.

저 자식 그러고 보니 어린 시절을 디아몬트에서 보냈다고 했지. 가끔 반응이 너무 록스버그 같아서 기분 나쁜 구석이 있단 말이야.

“루시루시 님, 너무, 너무 좋습니다!”

“자넨 뽀뽀하면 쏴 죽일 거야.”

“제가 그런 짓을 왜 합니까.”

록스버그 저택 행동강령에 의거해 박수를 짝짝 보낸 가젤은, 신경 써주셔서 감사하다며 허리를 숙이고 로즈로즈의 옆자리에 앉았다. 제 아버지가 저쪽에 앉든 말든 에리는 내 품에서 떠나질 않았다. 이 녀석이 진짜 커서 뭐가 되려고 이러는 거지.

“자네. 여기 어린이 식기 주게.”

에리 밥 먹이는 건 또 내 몫이로군. 난 하인에게 에리 덜어 먹일 식기를 내어오라 하고, 손 꼭 붙잡고 재잘거리는 로즈로즈와 가젤을 흘겼다. 열 받으니까 에리 좀 이용해야겠다.

“에리야. 네 엄마 좀 때려라.”

내가 명하자 에리는 기다렸다는 듯이 펄쩍 뛰어 로즈로즈의 복숭아뼈를 걷어찼다. 끼예악 하며 로즈로즈 특유의 괴성이 홀에 울려 퍼졌다. 고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