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작품 소개

저는 그 사랑이라는 것이 조금도 좋게 들리지 않습니다. 그것 때문에 제가 이렇게 죽습니다.

눈을 떠보니 내가 쓴 글 속. 그리고 나는 악하디악해 비참한 죽음을 맞이한 여자 조연 ‘에본느 라이네’가 되어 있다. 그리고 올해는 에본느 라이네가 본격적으로 죽음을 향해 내달리기 시작하는 그 해. 그런데 어째서 내가 쓴 것과 다른 일들이 일어나고, 내가 쓴 적도 없는 설정들이 존재하나. 까닭을 알 수 없는 내 감정들은 어찌 된 일이며, 까닭도 모르는 이 본능 같은 것들은 어찌 된 일인가.

내가 잃어야 하는 그것들은, 과연, 글의 이야기인가.

나의 꿈은 정녕 꿈이었나.

“제가 당신의 생명을 거둡니다. 원망, 하십니까?

“아니요.”

“해주십시오. 당신을 제 손으로 거둬야 한다면, 당신과의 관계도 잃고, 그 죽음 속에서 살겠습니다.”

“결코 자책하지 마십시오. 난 내 죄로 죽습니다.”

“당신이야말로 죄가 없습니다. 그리고 당신을 사랑할 수 있어 매 순간 행복하였던 저를 좀, 봐주십시오. 태어나주셔서 감사합니다. 당신은 그 숨결 하나하나마다 사랑받아 마땅한 사람입니다. 제발 살아주십시오.”

2. 작가 소개

작은밤

글쓰기를 좋아하고 상상하기를 좋아합니다. 촉촉한 느낌의 햇빛이 내리는 오전을 좋아합니다. 그 시간에 글을 쓰는 건 더더욱 좋아합니다.

3. 차례

#CHAPTER 2. 악을 위하여 (2)

#CHAPTER 헤르조. 네가 미워

#CHAPTER 3. 이기심을 위한 선

#CHAPTER 4. 꿈에서 (1)

#CHAPTER 4. 꿈에서 (2)

#CHAPTER 베르덴. 부디 기억하라

#CHAPTER 5. 사랑을 위한 사랑 (1)

4. 미리 보기

공작의 집무실에서 나와서 나를 기다리고 있던 기사들에게 설렁설렁 인사를 건넸다. 조금 멍한 머리를 한 채로 비척비척 내 방 지척까지 걸어왔다.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내 머리는 대체로 공상이나 사색으로 인해 온갖 생각으로 채워져 있었는데.

방에 거의 다다랐을 무렵, 나는 잠시 멈췄다. 의아해하며 나를 부르는 기사들에게 이만 가도 된다고 말했다. 두 기사가 떠나자 크게 숨을 뱉었다. 혹 충동적인 결정이었나. 눈을 감고 조용히 숨 쉬며 마음을 살폈다.

……아니. 아니다. 충동적이지 않았다. 설령 나 모르는 구석에서 충동적이었다 할지라도 내가 후계자위를 더는 거부하지 않겠다는 그 확답이 내 앞으로의 생에 무슨 영향을 끼칠지, 그 확답으로 인해 내가 책임지게 될 것이 무엇인지를 충분히 정리한 후에 입에 담았다.

오래도록 쥰을 나 대신할 사람으로 공작에게 어필하면서도, 내가 경계하고 불안해하고 있던 점이 하나 있었기 때문에 오늘 이 결정에 대해 생각할 시간은 길었다. 쥰을 어필한 시간만큼 나는 생각하고 망설여온 것과 다름없다.

“…….”

쥰이 글대로 나 대신 아리엘을 선택하면.

아리엘을 선택한 상태에서 쥰이 공작이 된다면.

그럼 그는 글대로 나를 적대할 것이다. 나를 죽게 하는 데에 힘을 보태리. 내가 가질 수도 있었던 권력을, 내게 칼을 겨누는 데에 쓰게, 되리.

그 위험을 생각하고 있기에 경계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경계만큼 공작위에 대한 내 거부감이 컸던 걸까. 아니면 여태 쥰이 나를 좋아해주었기에 마음이 덜 불안했던 걸까. 어쩌면 쥰이 글대로 공작위에 오를 시 일이 얼마나 심각하게 번질 수도 있는 것인지를 제대로 실감하지 못했다고 하는 게 옳겠다.

그러니 쥰의 유능함을 공작에게 어필해왔지. 아니면, 혹시 아는가, 글이 내 눈을 가리고 있었을지.

이틀간 짧게 당하고 겪은 것만으로 어느 정도 심각성을 실감하고 내 마음을 확실히 돌렸으니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내게 강한 마법이 있고, 강한 육체적 능력이 있어도 머릿수로 밀어붙이면 당해내지 못한다. 정치와 권력을 이용한 술수는 내가 가지고 있는 능력보다 무서운 구석이 분명히 있었다.

나는 다문 입술에 힘을 주고 양옆으로 쭉 늘렸다. 그러고 보니 그렇군. 준비해왔다고 생각했었건만, 아무것도 되어 있지 않았다. 쥰이 글과 다르게 나를 좋아하는 것. 친구가 아니어야 할 이들이 내 친구인 것. 크게 두각을 드러내지 못했어야 할 이 몸이 두각을 드러내고 있는 것. 숨기고 있는 힘이 있는 것. 또, 무엇이 있나. 없었다.

무심코 이마를 쓸었다. 이마에 댄 손가락 끝에 물기가 만져졌다. 식은땀이다.

난 정말 훌륭한 공작이 될 깜냥은 없을뿐더러, 공작의 의무와 책임을 의연하게 질 도량도 되지 않았다. 나를 안다. 나는 결국 그 무게에 집어삼켜지고 말 것이다.

그러나 뼈대 굵은 가문의 가주라는 자리, 그 권력. 애초에 누굴 택할지 확신할 수 없는 쥰에게 쉽게 쥐게 해줄 수는 없을 것들이었다. 아리엘이 존재하는 한, 난 이걸 그에게 넘길 수 없는 사람이다. 결국 처음부터 그랬던 것이다. 그럼에도 내가 내 자유와 해방감을 위해 막연하게 외면해왔던, 모양이며…….

언젠가 한 번은 쥰에게 사과를 해야 할 것 같다. 쥰. 경멸받는 게 ‘이 집안에서는 온당했던’ 그 아이. 어쩌면 나도 공작처럼 경멸해야 마땅했던 그 아이. 나를 걱정하던 그 아이. 그 다정한 웃음에 내 눈이 가려 막연한 안도를 품고 그를 이용해왔던 것과 다름없었다.

슬며시 스쳐 지나가는 이 공허가 약간 정신이 없다. 갈피를 잡을 수가 없어 안절부절못하게 되는 감이 있었다. 그런데 무엇에 대한 갈피인지 알 도리가 없어서 조금 웃겼다. 부러 굵게 끌어올린 한숨을 훅 쉬었다.

아직 이마 위에 머무르고 있는 손끝이 축축해졌다. 손을 비틀어 손등으로 땀을 거의 전부 훔쳤다. 나는 일그러지려 하는 입술을 이로 물고 끌어올렸다. 시선이 느껴진 탓이었다. 끌어올리고 이를 감추었다. 나는 손을 내리고 웃는 얼굴로 옆을 보았다. 조금 떨어진 곳에 베르덴이 서서 나를 보고 있었다.

“…….”

무엇을 위해 왔냐 물으려다 입을 다물었다. 짐작 가는 게 있었다. 죄송하다 무릎을 꿇었던 것도 거짓이었던 모양이지. 부리나케 서임을 깨러 왔군.

깔끔한 눈매에서 뻗어나오는 시선은 내 주관적인 시선으로 보기에는 날카로운 기가 있어서, 나는 다문 입으로 쓴웃음을 지으며 콧김을 푹 쉬었다. 어쩌면 다른 때와 같은 시선일 수도 있겠지. 내 심경에 따라 달리 보이는 것일 수도 있음을 알고는 있었다.

나는 몸을 바로 세우고 방 앞까지 걸어갔다. 문은 내가 열었다. 따라 들어오라고 열어둔 채로 먼저 입실했다.

내 걸음은 흔들리지 않았으나 스스로 느끼기에 어색하더라. 시립한 신하를 뒤에 두고 떠나는 이 방의 왕인 것처럼 어깨를 펴고 걸어 책상 앞에 섰다.

어디 보자. 어디부터 시작해야 하나…….

방황하던 손을 흠칫 움직였다가, 첫째 서랍을 열고 그 안을 뒤적거리는 척 열쇠들을 불러왔다. 그리고 몸을 굽혔다. 맨 아래 서랍. 가장 넓고 깊어 작은 상자를 넣어두기에 안성맞춤인 서랍이었다. 자물쇠 열리는 소리가 났다. 열쇠뭉치를 책상 위에 두고 서랍을 열었다.

베르덴의 맹세는 아주 고급스럽게 장식된 방에서 이루어졌었다. 그 서임식에서 나는 절차대로 그에게 새 검을 주었고, 그는 내게 그의 낡은 검을 주었다. 그걸 다시 주고받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후작과 나눈 계약서가 담긴 상자부터 찾았다. 다른 잡동사니가 있는 서랍 안에 상자가 나타났다. 그것을 꺼내어 뚜껑을 올리자 보이는 것은 약간 색 바랜 종이 세 장.

상자를 바닥에 내려놓고 계약서의 내용을 살폈다. 내가 이행해야 할 것은 분명히 존중을 보이며 서임을 부수고 베르덴을 후작가로 돌려보내는 것뿐이라 기억하고 있지만, 혹시 모르니 확인했다. 내용은 내 기억대로였다. 나는 계약서를 다시 상자에 넣고 탁. 뚜껑을 내렸다.

잠깐 그 상자를 내려다보다가, 맞아 들어간 딱딱한 모서리를 엄지손가락으로 쓸었다. 그러나 길게 추억에 잠길 생각은 없다. 상자를 도로 서랍에 넣었다. 자물쇠를 잠그고, 열쇠는 다시 첫째 서랍에 넣는 척 없앴다.

마침내 몸을 일으켰다. 책상에 가려 보이지 않던 베르덴이 보였다. 그는 나를 보고 있었다. 나는 오른쪽 벽으로 다가가며 말했다.

“검을 가져와요.”

두 개의 잘 깎인 고정대 위에 놓인 검을 두 손으로 받쳤다. 위로 호를 그리며 들어내자마자 묵직해졌다. 못 들 정도는 아니었다. 먼지는 없었다. 그러나 우리의 관계에는 이제부터 먼지가 쌓일 것이다. 오래도록 손에 익은 검을 놓아야 하는 기사. 그것을 돌려받는 주군. 무기를 주고받는 건 뜻이 그리도 중요했다.

「경은 이 무기를 경의 몸에 익숙하게 만들어도 됩니다. 경의 충성의 맹세를 저는 믿고, 저는 죽기까지 경을 거둘 것입니다.」

「제가 당신을 모시게 되기까지 저를 갈고닦으며 저와 동반했던 무기를 맡깁니다. 첫 무기를 맡기며 저를 당신께 맡기니, 저는 죽기까지 당신을 섬길 것입니다.」

오가는 의미가 지금 잠시 생각해봐도 무겁고 경건하기 그지없다.

그러나 나는 처음부터 베르덴을 내치도록 베르덴의 부친과 약속했었다. 미안하게도 내 맹세는 처음부터 약속된 거짓. 그에게 검을 내밀었다.

“그간 수고 많았습니다. 말괄량이를 보살피느라 힘들었지요.”

어차피 그가 내 기사가 된 이유로 들었던 바도 처리된 지 오래였다. 암살시도는 더는 없다. 아마도 쥰의 모친이 사망한 뒤부터. 그녀가 죽은 이후로 몇 번 더 있긴 있었지만 이미 수년 전의 일이다.

벨트에서 검을 풀어낸 베르덴은 내게서 먼저 검을 가져간 뒤에, 돌려주어야 할 것을 내밀었다. 손이 스쳤다. 내 손에 완전히 풀어놓기 전에 덜그럭거릴 정도로 한 번 쥐었다가 놓았다. 그 힘을 느끼고 침을 삼켰다.

나는 검을 품에 품듯 끌어와 두 손으로 잡았다. 내가 뿌렸던 것을 아마도 다 거두었다. 목소리가 젖었다. 사막에 야금야금 내린 비를 마신 것처럼. 젖었으나 말라서 쩍쩍 갈라졌다. 나는 그 부드럽지 못한 음성으로 마지막으로 인사했다.

“고마웠습니다.”

잠깐 나를 내려다보던 그가 나만큼이나 건조한 목소리로 사양했다.

“저는 그런 인사를 받을 자격이 없습니다.”

그렇다면야. 나는 예의상이라도 부정하지 않았다. 혹 다시 만나게 된다면 그때는 입에 발린 소리를 해야겠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그간 감사했습니다.”

“저도 그런 인사를 받을 자격은 없어요.”

“…….”

나 역시 감사에는 사양했다. 나는 눈을 찌푸리듯 헛웃음을 지으며 입술을 움직였다.

“경. 마지막으로 하나만 묻겠습니다.”

베르덴은 조용히 나를 보았다. 물으라는 허락이다. 하여 물으려 했다.

“내게.”

암살시도가 있었던 것, 네가 내 호위가 되기 전부터 알았다 하였다 했다. 넌 그걸 어찌 알았나.

묻고 싶었던 내용은 그것이었으나 나는 더 나아가지 못했다. 모르는 새 빠져 있던 감상에서 정신이 든 덕분이었다. 모르는 척 넘어가기로 하지 않았던가. 하지 말아야 할 질문이다. 그에게 아리엘의 살의를 말하며 충분히 경계를 주었다. 더 심을 수는 없다. 제대로 된 대답을 받을 것 같지도 않은데.

나는 어쩔 수 없이 코웃음을 푹 웃었다.

“아니, 아무것도 아닙니다.”

“…….”

“가세요.”

내 이 판단을 아쉬워할 것이다. 이렇게 벌써 보내는 것을 나는 어쩌면 아쉬워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럼에도, 진심을 다하여 아쉬워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아리엘이 베르덴을 시켜 내 약점을 잡거나 나를 해하려 들면, 내 가까이에 있는 호위기사이니만큼 내가 감수해야 할 것들이 많아진다. 베르덴이 나를 향한 암살시도를 알았을 때, 내 마음은 다시는 망설이지 않을 것을 알았다.

그는 결국 내게서 떨쳐 보내야 할 사람이라는 그 사실이, 후작과 약속을 할 때보다도 훨씬 분명해졌다. 그는 나를 위해 내 옆에서 사라져줘야 한다. 나는 이 일에 목숨이 걸려 있다.

검을 주고받았으니 되돌릴 수 있는 일은 없다. 베르덴은 마무리를 머뭇거리지 않았다. 마지막 인사라고 몹시 정중하게 허리를 굽히고 그대로 수 초간 머물렀다. 다시 섰을 때 그는 내게 시선 한 자락 주지 않고 몸을 돌렸다. 문 닫히는 소리가 나기 전에 나도 몸을 돌려 발코니의 문을 열었다.

난간을 붙잡고 아래를 보니 비어 있었다.

문 닫히는 소리. 두 팔을 들어 머리를 슥슥 모았다. 묶을 리본이 당장 손에 없다는 걸 깨닫고 손을 풀자, 긴 머리가 산발이 되어 흩어져 떨어졌다. 난간에서 떨어져나왔다. 일단 짐부터 꾸려야 하니까…….

나는 준비해야 할 것들을 생각하며 방으로 들어오다 말고 우뚝 멈추었다. 그리고 발코니의 입구에 서서 방 안을 빤히 살폈다. 긴 세월 머문 이 방에 이상한 기시감이 드는 듯했다. 새삼스러운 감각이다.

곧 길게 자리를 비워야 하여 감정이 일렁거려 그러하나. 가만히 응시하고 있자니 풍성한 바람이 불어와 펄럭거리는 커튼이 내 시야를 휘감았다.

“…….”

고요하다. 사락사락하는 소리조차 점차 사라지는 것 같았다. 조용하게 숨 쉬었다. 바람이 그치길 잠시 기다리다 검을 움직여 눈앞의 커튼을 걷어냈다. 검에 커튼이 휘감겼다가 춤추는 치맛자락처럼 둥글게 풀렸다. 물러가는 커튼 끝을 햇빛이 투명하게 비추었다. 나는 그 고즈넉한 광경을 좇다가 시야에서 사라지자 눈을 들었다.

자…….

나를 위해 글이 죽어야 할 시간이다. 방으로 들어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