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작품 소개

미안하다. 나는 더 이상 너의 연인이 아니다. 너와 나의 인연은 여기서 끝이다.

진 제국의 허랑방탕한 황태자 신유성 앞에 좌대신 김종찬의 종질녀, 야무지면서도 아름다운 김채영이 나타났다. 허송세월하던 그를 바로세우고 황제에의 길로 이끌어주는 그녀에게 속수무책으로 끌리는 유성이지만, 사실 김채영의 정체는 서나라의 진명 세자 은세류. 여자로서 왕위계승권을 쟁취해낸 그녀는, 진나라를 안으로부터 무너뜨리기 위해 잠입한 것이다.

처음에는 제 뜻대로, 제 계획대로 모든 게 진행될 줄 알았던 은세류. 하지만 저에게 온 마음을 다하는 유성을 보며, 그녀의 마음에는 미묘한 기운이 덮어드는데……. 그리고 그런 그녀를 지지해주며 옆에서 바라봐주는 그녀의 정인 진비월.

혼란한 국정, 혼란한 마음들 속에서 그들이 나아갈 길은 무엇인가.

“당신이 제게 어떤 답변을 들려주실지 잘 압니다. 허니 저도 당신에게 난처할 요구를 더 이상 하지 않겠습니다.”

“그럼?”

“이번 일이 당신의 계획대로 완벽하게 마무리되도록 간절히 기원하며, 신중하게 기다려야지요. 저는 그동안 당신의 귀환을 준비할 생각입니다.”

비월은 은세류가 우대신 김종찬의 종질녀 김채영의 가면을 벗고 본래의 자리로 돌아오는 일을 가리켜, 다른 곳으로 떠나 있던 사람이 본래 있던 곳으로 돌아온다는 ‘귀환(歸還)’이라고 칭했다.

세류는 이미 알고 있었다. 그녀가 다시 온전히 은세류로만 불리는 날을 가장 기다리는 사람은 바로 진비월이라는 사실을.

2. 작가 소개

은서우

자칭 현실주의자라면서 머릿속에서는 상상의 나래를 펼친다. 세상에 풀어놓고 싶은 이야기가 많아서, 느려터진 손에 한숨만 내쉬고 있다.

▣ 출간작

휘린(輝潾)

휘린(輝潾) 외전

3. 차례

제7장. 밀담

 #7-2

제8장. 여름 숲

 #8-1

 #8-2

제9장. 입동

 #9-1

 #9-2

제10장. 전초전(前哨戰)

 #10-1

 #10-2

 #10-3

4. 미리 보기

채영이 어째서 그때 정체불명의 독이 발라진 흉기에 당해야만 했는가!

의문은 신유성의 이성을 날카롭게 벼렸다. 불우의 사고로 김채영을 영영 잃어버릴지도 모른다는 공포는 그녀에게 화살을 날린 자를 결코 용서하지 않겠다는 증오와 분노를 불러일으켰다. 그자가 사냥물을 쫓다가 실수로 화살을 날렸대도 곱게 살려둘 의향이 없었다. 저승사자에게 그자의 목숨을 값으로 치르고 김채영의 생명을 구할 심산이었다.

신분의 구별이 있듯이 생명의 가치에도 경중이 있다.

유성은 탄정대와 병부성의 모든 병력을 동원하여 수렵지 구역을 구석구석 뒤졌다. 돌멩이와 풀 한 포기의 개수까지 일일이 파악해낼 기세였다. 대회장에서 허드렛일을 도맡았던 궁인들과 일반 백성까지 꼼꼼하게 살핀 결과, 유력한 용의자를 색출해냈다.

임시종자로 수렵회에 참가한 배을이라는 사내였다. 헌데 그자에 관해 면밀히 조사해보니, 명패에 적힌 내용들이 모두 거짓이었다. 본명은 천충으로, 비밀리에 의뢰를 받고서 사람을 죽이는 살수였다.

탄정장관 백현율의 보고에 유성은 진노했다. 국청을 열어 직접 천충을 신문했다. 천충은 어째서 수렵회에 참가하여 김채영에게 화살을 날렸는지를 순순히 불었다.

직물소의 세의방에 시수로 있는 홍주가 우대신가의 영애를 살해하고자 칼잡이를 고용했다. 천충에게 화살촉에 바를 맹독을 주고, 그가 사용할 거짓신분을 만들어주었다. 천충은 홍주의 도움으로 대회장에 쉽게 잠입했다.

무론, 조당 일등권신의 종질녀이자 장차 황후로 책봉될 영애를 죽이겠다는 엄청난 짓을 어떻게 일개 하급궁녀가 시도할 수 있겠느냐는 의혹도 제기되었다. 그러나 신유성은 천충에게서 더 이상을 캐내기보다는 원흉을 잡아들이는 일을 우선시했다. 홍주가 과거 기녀였을 적에 이미 김채영을 살해하고자 또 다른 칼잡이를 고용했었다는 사실까지 새롭게 밝혀지면서 국청은 다른 국면으로 전환되었다.

참극의 실질적인 주모자는 홍주로 확정되는 형국이었다.

그러나 홍주는 모든 혐의를 부인했다. 천충이 홍주와 계약했었다는 증좌로 제출한 문서들은 모두 날조된 것이라고 강변했다. 유성은 대로했다. 하여 자복과는 상관없이 홍주를 황실의 위엄을 능멸하고 황후를 시살하려고 했던 대역죄인으로 낙인찍었다. 그녀는 모진 형신으로 산송장이 되어서는 냉랭한 옥방에 투옥되었다. 유성은 홍주가 스스로 죄를 인정할 때까지 물 한 모금 주지 말라고 엄명했다. 그는 홍주를 아사(餓死)시키겠다고 공언했다.

이 모든 일은 8월 8일 오후부터서 9일 오전까지 전개되었다.

유성이 심장을 불태우는 불길한 예감을 떨쳐내고자 처절하게 몸부림치는 동안, 김채영은 홍휘전에서 시의들의 치료를 받았다. 그러나 그녀의 몸을 병들게 하는 독의 주요성분이 좀처럼 밝혀지지 않았다. 독을 잡지 못하니, 외상의 치료도 무의미했다. 명의라고 칭송받는 시의들이 아무리 백방으로 노력해도 김채영의 의식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러자 신기관에서는 의술로는 방책이 없다면 천의(天意)에 매달려보자며, 모든 신관으로 하여금 목욕재계를 하고 금식기도를 올리게 했다. 음양료에서도 혹시 발휘되었을지도 모를 악령들의 저주를 찾아내고자 온갖 주술을 부리거나 해원(解寃) 의식을 정성스럽게 거행했다.

……허나 이 모두가 헛된 수고들인 것을.

비월은 상체를 곧추세우고 앉아서는 침요의 은세류를 조용히 내려다보았다. 월하인의 최고 약제사가 심혈을 기울여 만든 극약인 위사진약(僞死津藥)은, 본디 허약하거나 병든 사람은 정말 죽일 수 있을 정도로 독성이 강력했다. 신체가 건강한 보통 사람이라면 반점 이내에 가사상태에 접어들고 마침내 동공반사까지 일시적으로 멈춘다. 그렇게 만 이틀은 정말 송장처럼 변했다가 해독제의 효력으로 사흘째가 되는 날에 거짓말처럼 깨어난다.

허나 세류에게서는 조금 다른 반응이 나타나고 있었다. 유일한 적통 후계자를 지켜내겠다는 서 왕실의 꾸준한 노력으로 그녀는 현재 웬만한 독은 무력화하는 내성을 지녔다. 하여 위사진약은 세류의 몸에서는 제 기능을 다하지 못하였다. 호흡은 유지하되 의식만 잃게 하는 수준에 그쳤다.

그 바람에 은세류가 가사상태를 깨트리고 숨결을 회복하는 날도 조금 늦춰지게 되었다.

그리고 신유성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노력한다면 김채영을 되살릴 수 있다는, 부질없는 희망을 품게 되었다. 그것은 김채영이 쓰러진 이후로 생기를 잃어버린 신유성을 움직이는 유일한 힘이었다.

비월은 입궁하면서 잠깐 보았었던 신유성의 모습을 떠올렸다. 청량전의 궁인들이 저희들끼리 주고받는 말을 주워들으니, 그가 어젯밤을 새하얗게 세우고 오늘은 점심수라까지 모두 걸렀단다. 측근들이 옥체가 크게 상할까 염려하여 섭식을 강권해도, 그는 미죽만을 조금 넘기고 말았단다.

솔직히 비월은 김채영의 혼수상태에 고통스러워하고 두려워하는 신유성을 무조건 냉랭하게만 대하기가 어려웠다. 만일 그가 신유성과 같은 입장이었더라면, 분명 그도 그러했을 터이니.

‘정말로 세류가 회생하기가 어렵다면, 해서 이 사람이 정말 사경을 헤매고 있다면…….’

비월은 다시 세류를 보았다. 이제는 뜨지 않는 눈과 움직이지 않는 입술. 아무리 흔들어도 미동조차 하지 않는 연인. 싸늘하게 식어가는 그녀를 다시 붙들 수 없는 비정한 현실을 자신이 어찌 버틸까. 그녀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세상의 공기를 어떻게 홀로 호흡할 수 있을까. 망망대해와도 같은 광활한 세상에 홀로 덩그러니 남았을 상황을 상상하니, 어떤 거대한 손이 나타나서 심장을 쥐어짜는 듯했다.

“……!”

비월은 찡그리면서 흉부를 움켜쥐었다. 이 세상에 나고 자란 모든 것들의 삶은 언젠가 반드시 종식된다. 그녀는 하늘에서 내려온 선인이 아니기에 언제가 되었든 그보다 먼저 저승길로 떠난다. 반면 그 자신은 모든 신력(神力)을 쏟아부은 마지막 술법을 성공하지 못한다면, 하늘의 권능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그녀가 없는 이승에서 영영 떠돌게 되리라.

허나 ‘그날’이 지금으로써는 가늠하기가 어려울 정도로 머나먼 뒤이기를 바란다. 이 사람이 없는 세상을 고독하게 견뎌내는 삶은 꿈에서조차도 싫었다.

울컥, 대번에 가슴이 뻐근해졌다. 비월은 어금니를 악물었다.

시간이 지나면 세류는 다시 깨어난다. 잠자코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는 사실에 감사했다. 비월은 웃옷의 옷자락을 움켜쥐던 손을 비로소 아래로 내렸다.

“황제 폐하, 납시었사옵니까.”

윤이수가 김채영을 찾아오면서부터는 문가로 물러앉아서 대기하던 시녀들이 동시에 일어섰다. 그 말을 듣고서 비월도 뒤를 돌아보았다. 신유성이 채영이 뉘인 장태(帳台: 귀퉁이마다 네 개의 기둥을 세워 휘장을 드리우고 자리를 한층 높게 만든 귀인의 침소)로 걸어오고 있었다. 비월은 일어섰다. 진의 황제를 향해 머리를 숙여 정중하게 인사를 올렸다. 이에 유성은 간단한 답인사 하나 없이 무뚝뚝하게 비월을 잠깐 보고는 침요 가까이에 있는 방석에 앉았다. 비월이 가만히 서 있으니 그제야 메마른 목소리로 한마디 했다.

“앉게.”

“예.”

비월은 침요 끄트머리에 놓인 방석에 앉았다. 신유성과는 두어 걸음 떨어진 지점에 위치해서인지, 말없이 김채영을 바라보는 그의 모습을 전체적으로 살펴볼 수 있었다.

사랑하는 여인을 결코 잃기 싫은 사내의 간절한 심정으로는 그녀를 되살릴 수 있다고 믿고 싶으리라. 허나 현실적으로는 의관들이 목숨을 걸고서 올리는 진언(進言)을 모조리 외면하기가 어려웠다.

궁중에서뿐만 아니라 대내리에서까지 김채영 규수가 사흘을 넘기지 못하고 종명하리라는 풍문이 급속도로 퍼지는 지금, 그는 감성만으로는 잔혹한 실제를 바꿀 수가 없다는 뼈아픈 결론을 받아들여야 한다. 성심을 굳게 잡수셔야 한다고 간하는 의관의 목을 벤다 한들 너무도 가까이 닥쳐온 연인의 죽음을 어찌 막을 수 있으랴.

너무도 참혹한 진실을 신유성도 알기 때문에 좀처럼 깨어나지 못하는 연인을 바라보는 눈빛이 촉촉하게 젖어들겠지.

반각쯤의 시간이 지나서야 유성은 껍질이 하얗게 일어난 입술을 천천히 움직였다.

“자네의 목소리에도 채영이 답하지 않던가? 하기야 친부 같은 당숙의 부름에도 응답하지 않았는데, 외가 쪽 육촌오라비가 불러본들 무슨 답이 되돌아올 수 있을까.”

마치 윤이수는 김채영의 의식을 일깨울 만큼 대단한 인물이 결코 될 수 없다는 단정 같은 말이었다. 이 와중에도 윤이수를 향한 질투심을 감추지 못하는 신유성을 대하면서 비월은 싱거운 속웃음을 쳤다. 제 짝에 대한, 일종의 소유권 같은 절대적인 권리를 주장하는 수컷의 독점욕은 역시 별수 없다. 며칠만 있으면 신유성의 지척에서 은세류를 떼어낸다고 은연중에 기뻐하는 자신의 모습도 그것과 일맥상통하지 않나.

비월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실은 내내 후회하였습니다. 누이는 폐하의 심기를 불편하게 해드리고 싶지 않다고 저의 호위를 거절하고 단신으로 대회장에 들었었습니다. 그때 저는 무슨 핑계를 대서라도 어떻게든 동행했어야 했습니다. 허면 이처럼 비통하고 참담한 일은 발생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마치 나를 원망하는 소리처럼 들리는군.”

유성은 시선을 여전히 채영의 파리한 얼굴에 두었다. 비월의 침착한 태도도 여상했다.

“예, 원망합니다. 허니 반드시 누이를 살려내십시오.”

진비월이 정말로 꺼내고픈 말은 한 자락도 내지 않고 고스란히 삼켰다는 사실까지 신유성이 알아차릴 리가 만무했다. 그는 고개를 돌려 비월을 응시하더니, 곧 시선을 거두었다. 또다시 채영을 보면서 강한 어조로 말했다.

“그래. 짐은 짐의 정인을 반드시 살려내겠다.”

얼마간 두려움에 떨던 스스로의 마음가짐을 다잡는 양 결연했다. 비월은 별다른 말로 응수하지 않고 무릎을 꿇더니 방바닥에 두 손을 짚었다. 그대로 상체를 굽혀 큰절을 올렸다.

몇 마디의 말로는 모두 다 표현해내지 못할 깊은 의미를 담았을 절을 받고도 유성은 잠잠했다. 다만 팔을 뻗어 채영의 손을 꼭 잡았을 따름이다.

비월은 자세를 바르게 하고서는 다시 말했다.

“허면 저는 이만 물러나보겠사옵니다.”

“그리하게.”

비월은 유성을 향해 묵례하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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