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작품 소개

세상에서 내가 절대 가져선 안 되는 것이 있다면 그게 바로 당신이요, 세상에서 내가 가장 갖고 싶은 것이 있다면 그게 바로 당신입니다.

나라를 잃은 고구려의 황녀 학아. 긍지 높고 아름다운 그녀는 백성을 위해, 나라를 위해 살아간다. 비록 그녀의 마음이 속으로는 문드러지고 고통에 비명을 지른다 하더라도.

혼란한 세상, 얽히는 이해관계 속 단아와 그런 그녀를 뒤에서 지키는 호위무사 무, 그녀와 자매처럼 자라온 미령, 장수 대무예의 마음도 엉켜드는데…….

“무엇이 두렵습니까?”

“사람을 잃는다는 거.”

“하늘의 뜻입니다.”

“만약 너를 잃게 되어도 그렇게 쉽게 말할 수 있을까. 하늘의 뜻이라고.”

2. 작가 소개

이선미

1971년 대구 출생.

성숙한 사람들의 사랑, 철부지들의 사랑, 자기애, 집착 등 사랑의 다양한 측면을 그리고 싶어 하는 작가. 궁극적으로는 ‘인간’을 담아내는 로맨스소설을 쓰는 것이 목적이라고.

▣ 출간작

아라사의 서우여

석빙화

광란의 귀공자

10일간의 계약

커피프린스 1호점

하록과 배태랑

달의 시 外

3. 차례

#10

#11

#12

#13

#14

#15

#16

#17

#18

#종장

4. 미리 보기

무는 돌아서서 그녀를 보았다. 그녀는 다시 손을 그의 가슴에 대었다. 손바닥을 대고는 가만히 있더니 손을 떼며 무거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얼마나 아팠던 거니? 너 다시 봤을 때, 하마터면 못 알아볼 뻔했어.”

“괜찮습니다.”

“보여줘.”

무는 그 말이 무슨 뜻인지 몰랐다. 그러다 뻗어오는 그녀의 손길에 깜짝 놀랐다. 온몸이 딱딱하게 경직되었다. 놀라서 멍해졌다. 재빨리 그녀의 손을 잡아 제지했다. 그녀가 고집스럽게 눈을 들었다.

“볼 테야. 보게 해줘.”

“아직 흉터가…….”

그러나 이미 검은 옷이 헤쳐지고 있었다. 황갈색 피부가 드러났다. 무는 그녀의 표정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그녀는 숨을 들이켰다. 가슴에 난 긴 상처는 화살촉을 꺼내려 베었던 칼자국이다. 그러나 정작 화살촉이 박혀 있는 자리는 살이 차올랐다. 분홍빛 새살이 우둘투둘 돋아 있었다. 그 위에 그녀는 손가락을 대었다. 그의 고통을 느끼려는 듯 보였다.

그녀는 미간을 찌푸렸다. 눈자위가 빨갰다.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의 손이 닿은 가슴이 빳빳하게 굳어졌다. 무는 예전으로 되돌아가 그녀가 원하는 것이면 무엇이든 해줄 수 있을 것처럼 가슴이 벅차올랐다. 그녀가 마음 아파하고 있는 것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이 속에 화살촉이 아직 들어 있다고? 이렇게도 살 수 있는 거니? 아프지 않아?”

“이렇게도 살아지더군요.”

“고마워. 이겨내 줘서. 이렇게라도 살아 있어줘서 고마워.”

무는 섬세한 손길을 피해 뒤로 물러섰다. 벌어진 옷을 여몄다. 손을 아래로 떨어뜨린 그녀의 수심 가득한 얼굴을 보았다. 그녀의 눈은 먼 하늘을 응시하고 있었다.

“너마저 떠났다면 나는 죽어도 하늘의 용서를 받지 못했겠지. 죽어 심판을 받을 자격조차 없이 지옥으로 떨어질 거야. 너도 알고 있지? 부희는 날 원망하고 증오하고 있을 거야. 막리지 어른께서는 배은망덕한 계집이라고 욕하시겠지. 그들을 되찾을 수만 있다면 무엇이든 할 텐데…….”

“후회하십니까?”

시선을 옮긴 그녀의 미소는 씁쓸했다. 무는 다가가 그녀를 가슴으로 안아주고 싶었다. 어떤 짓을 저지르든 그녀는 언제나 당당했었다. 설사 그 누군가가 고통을 당하더라도 해야 할 일이라 생각되면 머뭇거리지 않는 그녀였다. 이제 와 죄책감을 느끼는 것은 우스운 일이다. 그런데 그 우스운 일이 지금 그녀를 갉아먹고 있는 것이다.

오랜 친구 부희를 고통스럽게 하고 이해고에게 잡혀가도록 아무런 손도 쓰지 않았다는 것이 가장 큰 원인일 것이라 생각했다. 게다가 싸우고 있는 돌궐과 거란의 병사들 사이를 도망쳐 나오면서 사신단을 이끌었던 고문간을 두고 나오는 엄청난 실수를 한 것도 한몫 할 것이다. 병사를 이끌었던 걸사비우도, 그녀도 그 충격적인 사실에 망연자실했다. 어린 시절 그녀를 가르쳤던 스승이자 정신적 지주였던 고문간, 이제는 그의 생사조차 알 수가 없게 된 것이다. 사실을 알게 된 대조영 또한 엄청난 실의에 빠졌을 정도다.

“다시 되돌아간다고 해도 그렇게 했을 테지.”

“그렇다면 어째서 털어버리지 않으십니까?”

“글쎄, 두려워서일까.”

“무엇이 두렵습니까?”

그녀가 차라리 눈물이라도 흘리면 속이라도 시원할 것 같았다. 그녀는 힘없이 웃을 뿐 결코 고통에 찬 가슴을 내보이려 하지 않았다. 그러니 더욱 속이 검게 썩을 것이 아닌가.

무는 차분히 다가오는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뺨에 부드러운 손이 닿았다. 그녀는 목을 젖혀 올려다보며 그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꿈속에서도 바라지 못했던 일이 일어나고 있었다.

걷잡을 수 없는 열기가 전신으로 뻗쳤다. 그 누구보다도 몸의 흐름과 변화를 예리하게 느끼는 그였다. 감각의 파도에 밀려 이성이 흔들리는 것이 민감하게 느껴졌다. 무너지지 않으려고 전신을 긴장시켰다. 핏발이 선 그의 눈빛과는 달리 그녀의 눈은 너무도 부드러웠다. 촉촉하고 은근했다.

“사람을 잃는다는 거.”

“하늘의 뜻입니다.”

바람에 그의 긴 머리가 휘날렸다. 그녀는 바람에 눈이 시린 듯 가늘게 떴다. 무는 꼼짝없이 서서 그녀의 손에 자신을 내맡겼다. 가느다란 손가락이 마치 신기하고 새롭다는 듯 그의 이마와 짙은 눈썹과 눈두덩을 쓸었다. 그는 눈도 깜빡이지 않고 그녀의 눈만을 쳐다보았다. 그녀의 눈은 여행길에서의 입맞춤을 떠오르게 했다. 이 세상 것이 아닌 듯한 전율이 다시금 가슴을 휘어잡았다. 다시는 쉬이 마음의 경계를 잃지 않으리라 다짐했었는데…….

그녀의 부드러운 손가락이 그의 콧날을 타고 내렸다. 뺨을 감쌌다가 입술로 내려앉았다. 무는 가만히 서서 그녀의 손길을 느꼈다. 그 손을 따라 따끔따끔, 저릿저릿한 뜨거움이 옮겨 다니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그녀의 손바닥이 그의 얼굴을 감쌌다.

“만약 너를 잃게 되어도 그렇게 쉽게 말할 수 있을까. 하늘의 뜻이라고.”

무는 제 뺨에 놓인 그녀의 손을 감싸 쥐었다. 그들은 그렇게 잠시 멈춘 후 천천히 손을 내렸다. 마주 쥔 손을 놓기가 힘겨웠다. 그런 일이 점점 힘겨워지고 있었다. 그녀를 황녀로서만 대하는 것이, 주인으로서만 섬기는 것이 숙명이라고 되새겼다. 하지만 그건 그에게 이제 고된 훈련이었다.

“많이 걱정했니?”

“물론입니다.”

“왜?”

무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녀가 무슨 대답을 원하는지 알 수가 없다. 그녀를 걱정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그런 것을 새삼 묻고, 대답을 듣고 싶어 하는 그녀의 마음을 알 수가 없다.

“대답하기 싫으니?”

“당연한 일입니다.”

“어째서?”

“제 주인이시니까요.”

무는 너무도 명백한 대답을 해주었다. 갑자기 그녀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상처받은 것 같기도 했고 화가 난 것 같기도 했다. 영문을 알 수가 없었다. 그녀가 손을 놓았다. 시선을 떨어뜨리는 얼굴이 쓸쓸해 보였다.

“그렇다면 나도 네가 나의 무사여서 그런가 보구나.”

무는 쓸쓸히 돌아서는 그녀의 옷자락을 붙잡고 싶었다. 왠지 모르게 그녀를 상처받게 하고 내쳐지게 했다는 기분이 들었다. 그런 기분이 들 정도의 언행을 하지 않았다고 생각하면서도, 앞서 동산을 내려가는 그녀의 뒷모습이 자꾸만 마음 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