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코틀랜드의 하일랜드
1998년 2월

어지간히도 불편한지, 말은 머리를 치켜들고 코를 찡그리더니 이어 재채기를 해댔다.
욕지거리를 뱉어내려고 입을 열었던 앨릭잰더 스미스는 곧 자신이 처한 참담한 처지를 깨닫고는 마구간 문고리를 움켜진 채 천천히 입술을 다물었다. 자세히 들여다보고 싶지 않은 물질을 시야에서 지우려고 그는 미친 듯이 눈을 깜빡거렸다.
역시 계속 잠이나 잤어야 했다.
물론 그건 깨어나던 순간부터 이미 알고 있는 바였다. 그런 생각이 들게 한 첫 번째 단서는 지붕을 때리던 빗소리였다. 56일째 계속되고 있는 스코틀랜드의 호우(豪雨). 그 다음 경고는 차가운 물이 쏟아져 내리는 샤워꼭지 아래서 벌벌 떨었던 일. 빌어먹을 동생 녀석이 더운물을 다 써 버린 것이었다. 잇달아 생긴 불행의 끝은 소시지, 계란, 감자튀김을 아침식사거리로 기대하며 열어본 냉장고 안에 상해 가는 치즈와 곰팡이가 피기 직전의 빵밖에 남은 것이 없다는 것을 알게된 것. 동생의 턱에 묻어 있는 기름기의 흔적을 본 순간 사태의 책임이 누구에게 있는지 즉각 알아낼 수 있었다.
그것도 모자라서 이제는…….
앨릭스는 지저분해진 셔츠를 내려다보았다. 이대로 집안에 들어가면 말 오물이 뒤섞인 빗물을 사방에 흘리게 될 텐데, 이게 다 말라서 눌러 붙으려면 도대체 얼마나 있어야 할까.
조금 전에 비해 훨씬 편안해진 듯한 말은 미안한 마음이 드는지 주인의 얼굴에 살갑게 코를 문지른다.
앨릭스는 조심스럽게 소매로 입가를 닦아내며 말에게 한소리 한다.
「비스트, 설마 이런 몰골로 밖에 나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그러다가 예쁜 스코틀랜드 아가씨랑 우연히 마주치기라도 하면 어떡하냐? 우릴 어떻게 보겠냐구?」
비스트는 정말로 부끄러운지 고개를 푹 수그린다.
앨릭스는 불만에 찬 목소리로 말을 달랬다.
「괜찮아. 자, 그럼 좋은 하루 보내라. 호흡이 고르게 돌아왔으니까 그럴 수 있을 거다. 이제 난 다시 자러 가야겠다.」
지금으로선 그게 가장 안전한 선택일 것 같다.
깨끗한 셔츠자락으로 얼굴을 닦아내고 나서 그는 마구간을 나와 정원을 가로질러 걸었다. 이층에 창문 몇 개가 달려 있을 뿐 온통 회색 돌로 지어진 난공불락의 성벽이 눈앞에 우뚝 솟아 있다. 매제인 제이미는 자신의 성을 재건하는 데 거금을 쏟아부었고 그 결과는 소름이 끼칠 정도로 굉장했다. 마치 플레이드를 걸친 중세 스코틀랜드의 전사들이 검을 휘두르고 밴쉬(아일랜드와 스코틀랜드 민화 속에 등장하는 여자 요정. 울음소리로 죽음을 예고함)처럼 소리를 질러대면서 성문을 뚫고 쳐들어오는 모습이 그려질 지경이었다.
홀 안으로 들어선 앨릭스는 부서져라 문을 세게 닫았다. 실내 불빛에 눈이 익숙해지자 벽난로 앞에 앉아 발을 녹이고 있는 동생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앨릭스는 철부지 막내동생을 된통 혼내줄 요량으로 넓은 홀을 성큼성큼 가로질렀다. 다시는 토요일 아침을 이렇게, 뜨거운 물과 영양가 있는 음식이 없이 시작하고 싶진 않다.
재커리는 읽고 있던 책에서 눈을 떼고 형을 쳐다보더니 웃음을 터뜨렸다.
「으이그으으으.」
녀석의 목을 조르면 분이 절반이나 풀릴까.
재커리는 숨이 넘어갈 듯 깔깔거리며 물었다.
「아이구, 이런, 얼룩 괴물한테 한 방 당하고 온 거야?」
앨릭스는 이를 부드득 간다.
「네 녀석이야말로 내 주먹에 한번 당해 보는 게 어떠냐?」
「어유유유, 그러지 말고 일단 샤워부터 하시지요.」
재커리는 짐짓 몸서리를 치는 척하면서 시치미를 뗐다.
「하기 싫어서 안 하냐?」
「도대체 뭐가 문젠데? 내가 할 땐 더운물이 잘만 나오던데.」
「알아!」
재커리는 결백하다는 듯 눈만 깜빡거렸다. 그러더니 기분 나쁘게 잔뜩 부른 배를 천천히 문지른다.
「냉장고 안이 텅 비었어, 자식아. 누구 짓이라고 생각하냐?」
재커리는 먹을 것 하나 없이 집에 홀로 남겨진 사람처럼 짐짓 한숨을 쉬었다.
「아, 난 이래서 매형이랑 누나가 집을 비우는 게 싫단 말야. 최소한 패트릭이나 자슈어는 남겨두고 갔어야지. 자슈어가 만드는 디저트는 거의 환상적인데.」
그러더니 이어서 앨릭스를 빤히 쳐다보며 말한다.
「도대체 왜 내가 형 같은 사람한테 빌붙어서 살았지? 냉장고 하나 제대로 채워놓지 않으려는데 말이야.」
앨릭스는 철부지 같은 동생을 흠씬 때려주곤 했던 일들을 잠시 떠올렸다. 아련하고 마음 따뜻해지는 추억에 잠시나마 짜증이 누그러지자, 비로소 차분하게 이야기가 나온다.
「그럼, 네가 좀 가게에 갔다 오면 어디 덧나기라도 하냐?」
재커리는 푹신한 의자에 몸을 더욱 깊숙이 파묻으면서 발가락을 불가에 더 가까이 가져갔다.
「난 너무 바빠. 형이 좀 갔다와. 가서 먹을 만한 것 좀 사오라구. 건강 식품 같은 쓰레기는 빼고.」
앨릭스는 마음속으로 열까지 셌다. 별 효과가 나타나지 않자 이번에는 좀더 큰 숫자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재커리는 다시 형을 쳐다보며 히죽거리기 시작했다.
「있잖아, 형? 내가 형이라면 샤워부터 하겠어. 정말이라구. 그게 지금 바로 형이 해야 할 일이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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