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 살, 연애 한 번 못해본 편집부 말단 직원 백은서. 어느 날 천금 같은 행운이 찾아왔다. 프랑스에서 열리는 르헤브 출판 파티에 출판사 대표로 출장을 가게 된 것! 어쩌면 달콤한 사랑도 찾아오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품고 프랑스행 비행기에 오르고, 비행기에서 굉장히 묘한 인상을 가진 남자와 작은 사고가 일어난다. 어차피 다시 만날 사이도 아니라고 치부하지만 그 남자를 출판 파티에서 다시 만나게 되는데...굉장히 위험한 향기를 풍기는 남자. 사실 그는 은서를 조직의 스파이로 오해한 정보국의 요원이었다.

<본문 중에서>

창가 쪽에 자리를 잡은 은서는 다시금 설레는 마음이 들었다. 사실 그녀는 프랑스가 처음이 아니었다. 앞서 말했듯 어릴 적 워낙 엄마를 따라 여행을 많이 다녔기에 프랑스도 두세 번은 가본 적이 있었다. 그녀는 학교 역시 세계를 돌며 자유롭게 다녔다. 그러다 소설가가 되고 싶어 한국에 정착하게 되었고, 엄마는 지금도 어딘가에서 하고 싶은 여행을 계속하고 있을 것이다. 최근에 도착한 편지를 보니 지금은 이집트에 계신다고 들었다.
지금 출발하면 아마도 새벽이나 아침에 도착할 것 같았다. 이차에 잠이나 좀 자야겠다 싶어 챙겨온 수면안대를 착용하려는 찰나, 누군가 그녀의 어깨를 가볍게 흔들었다.
“잠시 만요.”
낯선 남자의 목소리에 은서는 살짝 흠칫하고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순간 마주친 눈동자에 움직임을 멈추었다. 마치 늑대의 눈동자처럼 무척이나 짙은 암회색빛 눈동자였다. 게다가 굉장히 기묘한 빛을 띤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그런 색. 혼혈인가?
남자는 그녀를 향해 엷은 미소를 띠고 있었다. 전체적으로 굉장히 굵은 선을 지닌 얼굴과 딱딱하면서도 강인한 턱 선을 중심으로 날렵하게 떨어지는 콧날과 살짝 두꺼운 입술선. 게다가 말할 때마다 움직이는 목젖이 굉장히 섹시하게 느껴졌다. 뭐? 잠깐만, 백은서.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네?”
은서는 이제야 정신을 차리고서 남자를 향해 입을 열었다. 그러자 남자의 시선이 다시금 부드럽게 휘어졌다.
“좌석이 잘못된 것 같습니다. 거기가 제 자리 같은데요.”
“아! 죄송합니다.”
너무 서두른 나머지 좌석을 잘못 본 모양이었다. 은서는 재빨리 벗고 있던 신발을 신고서 몸을 살짝 움직이려는 찰나, 그의 손길이 그러한 그녀의 어깨를 가볍게 눌렀다. 남자의 작은 손길에는 힘이 묻어나고 있었다. 그 힘에 다시 자리에 앉은 그녀는 의아한 시선으로 그 남자를 바라보았고, 남자는 여전히 빨려 들어갈 듯한 시선으로 그녀를 잠시 빤히 바라보더니 이내 어깨에 닿았던 손이 그녀의 얼굴을 만지려는 듯 느릿한 움직임에 은서는 순간 저도 모르게 몸이 움찔했다. 뭐야, 지금 작업 거는 거야? 그것도 이렇게 뚫린 장소에서 이런 적적인 행동을!
은서는 순간 그를 밀쳐야 한다는 생각보다는 머리가 멍해지면서 저도 모르게 숨을 삼켰다. 아주 작은 움직임에도 그의 세련된 아르마니 정장에선 톡 쏘는 향기가 느껴졌다. 무척이나 독한 향기이긴 했지만 그게 왜 이렇게 이 남자에게 어울린다는 생각이 드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것도 생판 처음 보는 남자에게서.
저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은 그녀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자 살며시 눈을 떠보았다. 눈앞에 남자는 여전히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을 지으며 낮고 깊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냥 거기 앉아 계세요. 그리고 이거.”
그의 손끝에 닿아 있는 것은 그녀의 눈덩이를 묵직하게 해 주었던 속눈썹이었다. 아까 넘어질 때 속눈썹이 떨어졌었나 보다. 그것도 모르고 눈 밑에 속눈썹을 붙인 채 달려왔으니, 사람들이 웃을 수밖에. 게다가 이 남자는 그게 창피할까 봐 배려해 준 모양인데 그게 더 쪽팔린다!
은서는 도저히 이 쪽팔림을 감당할 수가 없어 남자의 손에서 얼른 속눈썹을 낚아채고선 붉어진 얼굴을 얼른 수면안대로 가렸다. 이 무슨 개망신인가! 아욱! 백은서 이 화상아, 남자가 그렇게 고팠니? 남자에 굶주렸어? 정말이지 최악이다. 일만 아니었어도 이 비행기, 그것도 이 남자 옆자리에 같이 있기 싫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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