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작품 소개

“이성으로서, 한 남자로서, 좋아해. 저와 사귀어주세요.”

수석은 도맡아놓았고, 용모 수려해, 집안 빵빵해, 모두가 동경하는 히렌 가의 공자님 카이츠 아일 히렌. 그런 그에게 적대감을 품은 유일한 여자사람 아란 지는, 성실하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운 헤스키츠 제국 아카데미의 만년 차석이다. 하지만 아란이 저를 어떻게 보든, 저에게 뭐라고 하든 히렌에겐 병아리가 삐약대는 걸로밖에 안 보인다.

히렌을 타도하겠다는 목표로 보낸 아란의 6년 세월. 아카데미의 졸업반에 들어선 그들의 질긴 인연은 조금씩 그 색깔을 달리하기 시작하는데…….

“맨날, 매일매일매일! 나 병아리라고 불렀잖아! 까만 병아리라고! 그러니까 병아리라고 불러! 이름 부르지 말란 말이야!”

“왜 이름을 부르면 안 되는데?”

“기분이 이상하니까!”

“어떻게 이상한데?”

“귀가 녹을 것 같아! 막 가슴이 간질간질거리고 손발이 뜨겁고 몸도 뜨겁고! 흐엉, 병 걸렸나 봐. 너랑 있기만 해도 심장병 걸리는 것 같은데 네가 이름까지 부르면 나는 죽을 것 같단 말이다!”

2. 작가 소개

정연주

최근에 거주 환경이 집필에 최적화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물 좋고 공기 좋은 시골! 흉흉한 소문과 소문보다 더 빡빡한 막차 시간! 덕분에 외출도 어렵고 해서 집필에만 몰두하고 있습니다. 이 삼박자 떨어지는 곳이 어디냐면 화성입니다. 화성(星) 말고 경기도 화성.

……위험하지 않냐는 지인의 질문에 이렇게 대처하고 있습니다. 그냥 시골이라 제철채소가 참 맛있다고요(웃음).

▣ 출간작

기화, 왕의 기생들

야수의 청혼

인어의 목소리

캔버스 위의 당신

붉은 매듭

도깨비 각시

가희 사랑할지어다

달빛을 밟는 아씨

어드레스

헤스키츠 제국 아카데미(공저)

차아제국 열애사(공저)

허니 앤 베어(공저)

하늘 창(공저 단편집)

겨울 엔딩(공저 단편집)

마음을 낚는 이야기꾼 웹소설 작가 되기(공저)

양효진

1989년 3월, 절과 돌탑, 왕릉이 많은 도시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책읽기를 좋아하긴 했지만

소설을 쓰기 시작한 건 대학교에 들어온 이후.

그 전에는 남들처럼 먹고, 자고, 공부하는 평범한 인생을

살았습니다. 하고 싶은 걸 다 하고 살라는 부모님의 말씀에

충실한 지금이 만족스럽답니다.

현재 대한민국 어딘가에 있는 해가 잘 들어오는 집에서

매일매일 마감에 쫓기는 삶을 사는 중.

▣ 출간작

엘샤 꽃나무 아래에 앉아서

계약의 목걸이

너의 온기에 안기다

눈부신 그대

파란만장 태자호위담

그는 내 심장을 뛰게 한다

내 꿈으로 놀러 와요

아이고, 폐하!

헤스키츠 제국 아카데미(공저)

차아제국 열애사(공저)

허니 앤 베어(공저)

마음을 낚는 이야기꾼 웹소설 작가 되기(공저)

하늘 창 (공동저작 단편모음집)

겨울엔딩 (공동저작 단편모음집)

3. 차례

#34. 새 학기의 시작도 끄악!

#35. 뼈대 있는 집안

#36. 병아리를 사수하라

#37. 외상값을 받아야겠소

#38. 교통정리가 필요한 시점

#39. 가을 하늘 아래 달려라

#40. 그들은 절대 우리를 배려해주지 않는다

#41. 던전 입장

#42. 던전 공략

#43. 수확의 계절

#44. 솜털이 빠지는 시간

#45. 덫을 놓은 줄도 모르고

#외전 5. 카이츠의 하루(휴일)

#외전 6. 타이젠의 하루(평일)

#외전 7. 그땐 너도 나도 병아리

4. 미리 보기

“말해.”

“뭐, 뭘?”

“요즘 왜 날 피하지?”

역시 도망간 게 문제였던 거다. 직구를 던졌는데 엄청 속도가 빠른 직구라서 받아 다시 던질 수가 없다. 그래서 난 슬며시 옆으로 한 발자국 비켜섰다. 뻔뻔하게, 뻔뻔하게 나가는 거다!

“굳이 피한 건 아니야.”

아악, 내가 생각해도 너무 변명이 궁색해! 그리고 히렌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나와 똑바로 눈을 맞췄다.

“지금도 피하고 있는데? 좋아, 어쨌거나 일단은 넘어가주지. 오늘 도망친 건 틀림없이 화장실이 급했다는 이유가 나올 것 같으니까. 6학년 교실에서 빙글빙글 돈 것도 넘어가줄게. 하지만 쪽지시험을 채점하고 나서 도망간 건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어서 말이지. 왜 그랬어?”

쪽지시험? 으, 그렇게 먼 과거부터 추궁하는 거냐! 기억력이 너무 좋아도 문제구나. 이유, 이유를 생각해야지. 어, 그때 셔츠를, 팔뚝이…… 아!

“더웠어. 그래서 시원한 바람이 쐬고 싶었을 뿐이야.”

“그럼 천천히 걸어야지. 뛰면 더 더운데.”

“사람은 가끔 뛰고 싶을 때도 있어. 그것보다 내려줘. 발이 땅에 안 닿아서 무섭단 말이야.”

그러자 히렌은 오히려 팔에 힘을 더 주면서 대답했다.

“놓으면 도망갈 거잖아.”

“도망 안 가. 자세도 불편하고 허리도 아파. 내려줘!”

창피하지만 안기기 싫어하는 아이처럼 온몸을 크게 휘저었다. 히렌은 어쩔 수 없다는 듯 또 도망가지 말라고 주의를 주고는 날 내려주었다. 아, 팔목을 꽉 잡고 있어서 움직일 수가 없다.

“도망 안 가. 애당초 난 도망간 게 아니야. 뛴 것뿐이지.”

얼굴에 철판을 깔았다. 어차피 지금 여기는 우리 둘밖에 없으니까 히렌이 누구에게 말하지만 않으면 괜찮다.

“그럼 날 보고 왜 더 속도를 올렸지?”

“무서웠단 말이야. 맹수에게 쫓기는 어린 사슴이 된 느낌이었는걸! 본능이 달리라고 시켰다고!”

음, 이것도 사실이니까. 진짜 무서웠다. 뒤에서 전속력으로 달려오는데 잡히면 나 죽겠다는 생각이 절로 들더라.

“그건, 미안해.”

히렌이 사과를 했다. 자신이 잘못했다고 생각하는 부분에서는 이렇게 확실하게 정리를 한다. 으, 왠지 가슴 안쪽에 있는 양심이란 놈이 콕콕 ‘나 아파! 아프다고! 주인아, 나쁜 짓 하지 말란 말이야!’ 이렇게 외치는 것 같다. 하지만 단호하게 무시했다. 난 빨리 집에 가야 해. 더 이상 히렌을 마주 보면 안 된다고 내 예감이 외친다. 여자로서의 감이 말하기를, 이 이상 시간을 끌면 좋은 꼴 보기 힘들다고 말하고 있단 말이다.

“나 집에 갈래. 늦게 가면 걱정하실 거야.”

슬슬 하늘도 어둑해지고 있고. 조금만 더 있으면 해가 질 거다. 연락구슬은 잠잠하지만 오래지 않아 반짝거리겠지. 이거라면 히렌도 날 놓아줄 거다. 그런데 나는 히렌을 과소평가하고 있었다. 이 녀석이 한번 물면 얼마나 끈질기게 물고 늘어지는지 잠시 잊고 있었던 거다.

“그럼 데려다 줄 테니까…….”

“혼자 갈 거야! 괜찮아! 너도 그냥 집에 가.”

데려다 준다니. 그러면 널 피한 의미가 없잖아! 급한 마음에 꽥 소리를 지르다 보니 창피하게 음이탈까지 했다. 하지만 그래도 꿋꿋하게 말을 바꾸지 않았는데, 그러자 히렌의 표정이 뭔가 어둑어둑해지기 시작했다.

“역시, 피하고 있어.”

확신에 가득 찬 분노 어린 목소리. 이때 느낀 내 심정은 딱 이거였다. 이제 틀렸어. 내가 내 무덤을 판 거라고. 눈앞에 있는 예쁘지만 무서운 마신 강림을 보며 나는 속으로 엉엉 울었다.

“아란, 왜 거짓말을 하지? 내가 뭐 잘못하기라도 했어?”

그건 아닌데. 미안해져서 고개를 돌린 채로 바닥을 보았다. 얼굴이 또 홧홧하게 달아오르기 시작한다. 민망하고 부끄럽고 도망가고 싶다. 솔직히 어떻게 말하냐고. 그냥 너만 보면 가슴이 뛰고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뜨거워지고, 부끄럽다고.

“날 봐.”

“싫어! 아니, 싫다!”

“왜?”

또 기묘한 침묵. 아, 진짜 이놈의 입에 풀을 붙여놓든지 해야지. 난 왜 호신술을 배우지 않았던 걸까. 팔목이 너무 단단하게 잡혀 있어서 달려 나갈 수가 없다. 정말 엉엉 울고 싶은 심정이다. 울까? 울어버릴까? 그럼 더 이상 안 물을 거 같은데. 근데 울면 달랜다고 또 옆에 있을 것 같단 말이지.

“집에 갈 거야. 혼자서 잘 갈 테니까 팔목 놔줘.”

“대답해주기 전에는 못 놔.”

“그, 그러니까 대답하고 싶지 않은 것도 있는 거잖아!”

“지금 놔주면 내일부터는 더 꼭꼭 숨을 거 아냐!”

“으아아아!”

정말 돌아버리겠다! 누가 나 좀 구해…….

“거기 누구냐! 왜 자꾸 떠들어! 지금 공부하는 거 안 보여? 잡으러 간다!”

엄마야, 창문 밖으로 교수님이 얼굴을 내밀고 호통을 치셨다. 우리 둘은 완전히 당황해서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교수님의 인영이 사라지자 히렌은 날 급하게 안아 들고 달리기 시작했다. 들키면 망신도 이런 개망신이 없다. 나는 히렌을 피하려고 했던 것도 잊고 히렌에게 매달려 응원했다. 달려라, 달려, 히렌! 이 모습을 저학년과 교수님께는 보여줄 수 없다!

◇ ◆ ◇

“이 정도면 괜찮겠지.”

정원의 깊숙한 곳까지 들어오고 나서야 우리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볼에 닿는 공기가 더 차갑다. 이쪽은 그늘이 졌으니까. 뭔가 쌀쌀해서 어깨를 부르르 떨다가 햇빛이 비치는 쪽으로 나가니 강당으로 보이는 벽이 뒤에 쭉 이어져 있었다. 여기는 어디냐.

“동쪽이야, 남쪽이야? 어디로 온 거지?”

“글쎄, 하지만 교실이랑 별로 멀지는 않을 거야. 먼 거리를 달리지는 않았으니까.”

호오, 손이 시려서 쓱쓱 비비고는 주머니에 넣었다. 아, 좀 따뜻하네. 교수님 덕분에 화내던 것도 까먹은 거 같으니까 이 틈을 타서 집에 자연스럽게…….

퍽! 내 옆으로 뭔가가 날아와 턱하고 진로를 가로막았다. 깜짝 놀라 몸이 펄쩍 뛰었다. 그리고 반대쪽으로도 팔이 탁! 눈만 굴려서 옆을 보았다. 아주 철통이다, 철통! 빠져나갈 수가 없다. 으허어엉!

“도망가지 말라니까. 아직 이야기 안 끝났어.”

얼굴이 너무 가까워, 너무 가깝다! 심장이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무슨 준비? 전력질주 할 준비! ‘히히, 주인아. 나 뛴다! 뛴다고!’ 이렇게 웃으면서 다다다다 달리기 시작했다. 망할 놈의 심장! 어서 멈추지, 못할, 아. 심장이 멈추면 나 죽지. 그럼 멈추지는 말고 어서 속도를 늦추지 못할까! 나 힘들다고!

“아란, 사람을 앞에 놓고 다른 생각 하는 건 예의가 아닌데.”

표정이 험악해. 게다가 또 이름 불렀어. 히렌이 어떤 표정이든 그 입에서 내 이름이 나오면 나는 어쩔 줄 모르겠다. 뭐랄까. 히렌의 감정과 상관없이, 히렌이 내 이름을 부르면 왜 그렇게 달콤하게 들리는 것일까? 지금만 해도 그렇다. 저렇게 화를 내고 있는데도 내 이름만큼은 달달하다. 얼마나 달달하냐고 묻는다면 약과보다도 더!

“차라리 병아리라고 불러!”

뒤는 벽이지만 앞은 히렌이 가로막고 있기 때문에 최대한 벽에 찰싹 달라붙었다.

“병아리라고 부르라니?”

“맨날, 매일매일매일! 나 병아리라고 불렀잖아! 까만 병아리라고! 그러니까 병아리라고 불러! 이름 부르지 말란 말이야!”

적반하장도 유분수 격이지만 어쩔 수 없다. 히렌과 함께 있으면 심장이 앗, 뜨거워라! 발발발 뛴다. 그런데 히렌이 내 이름까지 부르면? 그 불난 심장에 기름을 들이붓는 기분이란 말이다. 일단 내가 살고 봐야겠어! 이대로 있다가는 심장이 터져서 죽을 것 같단 말이지. 성인도 되기 전에 사망할 수는 없다!

“왜 이름을 부르면 안 되는데?”

“기분이 이상하니까!”

“어떻게 이상한데?”

나는 거기서 멈췄어야 했다. 그냥 시치미 뚝 떼고, 무서워서 엉엉 우는 것이 더 나았을지도 모른다. 적어도 그렇게 했으면 나중에 덜 창피했을 테니까. 그런데 그때 나는 그럴 사정이 전혀 아니었다. 이유? 이미 히렌과 쫓고 쫓기는 추격전을 벌인 뒤인 데다가 내 심장은 이성을 통제할 수 없을 만큼 쾅쾅 뛰고 있었으니까! 쾅쾅!

“네가 내 이름을 부르면 심장이 아파!”

“뭐?”

“귀가 녹을 것 같아! 막 가슴이 간질간질거리고 손발이 뜨겁고 몸도 뜨겁고! 흐엉, 병 걸렸나 봐. 너랑 있기만 해도 심장병 걸리는 것 같은데 네가 이름까지 부르면 나는 죽을 것 같단 말이다! 그만 불러. 차라리 까만 병아리라고 부르는 게 좋겠어. 적어도 내 심장의 안녕을 위해 넌 내 말을 들을 필요가 있어!”

아아. 나는 이미 이성이고 뭐고 정신줄을 놓은 게 틀림없다. 진짜 입은 되는대로 막말을 하고 있었다. 나불나불, 창피하고 부끄러운 이야기가 내 입을 통해 나왔다. 아까 들렸던 쾅쾅 소리는 심장이 뛰는 소리가 아닌가 보다. 그건 그냥 판례 때 내리치는 망치의 소리였어. 내 인생을 끝내는 망치의 소리였다고, 엉엉.

“그래서 이름을 부르지 말라는 거야?”

“그래.”

쥐구멍이 있으면 들어가고 싶다. 텔레포트를 쓸 수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나는 이제 숫제 모든 걸 체념한 상태였다. 에라, 모르겠다. 오늘로 내 인생의 가장 큰 흑역사가 탄생한 거다. 이제 앞으로 히렌을 어떻게 봐야 하나. 몸이 하얗게 불타 재만 남은 것 같다. 아니, 이 경우 몸이 아니라 마음인가. 어쨌든 내가 지금 제정신이 아니다.

“정말?”

“왜 자꾸 물어!”

머리가 무슨 불에 올려서 잔뜩 달궈진 냄비 같다. 그런데 히렌이 내 신경질이 잔뜩 섞인 대답에 정말 생각지도 못한 대답을 했다.

“좋아서.”

으엉?

“아, 정말 오래 걸렸다.”

뭔가, 화를 엄청 내거나 어이없어할 줄 알았던 히렌은 내 예상을 깼다. 뭐지? 왜 저렇게 개운한 표정을 짓지? 히렌이 얼마나 상쾌한 표정을 지었냐고 하면, 내가 7년 동안 한 번도 저런 얼굴을 본 적이 없을 정도였다. 마치 대업을 이룬? 그것도 아니면 밀렸던 과제들을 한꺼번에 해결한 듯한? 뭐라고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가볍고 상쾌한 모습에서 하나 안도할 만한 것은, 적어도 화가 풀린 것 같다는 것이다.

“어, 화 안 내?”

“왜 화를 내는데?”

“방금 전까지 막! 내게 화를 막!”

어이가 없어진 쪽은 내 쪽이다. 히렌에게 잡힌 손까지 막 휘저으며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있는데 히렌이 웃음을 터뜨린다. 그렇게 웃는 거 반칙. 반칙이다, 이놈아! 지금 분명 가을인 거 맞지? 옆에 있는 나무에서도 막 낙엽이 거의 쏟아지고 앙상한 가지만 남은 그런 늦가을. 그런데 왜 갑자기 우리 주변에는 꽃잎이 흩날리는 거냐?

역시 이 녀석은 성별을 잘못 타고났어. 여자로 태어났으면 제국을 쌈 싸 먹고도 모자라 다른 제국 및 왕국도 노려봤을 만한 미모다. 문제는 그런 외모가 이제는 내 심장에 불 지르는 주요 원인이 되었다는 거다. 악, 그만 웃어! 내가 말한 대로 심장이 막 뛰고 얼굴이 붉어지고 그런 걸 실시간으로 증명할 필요까지는 없잖아!

“아란.”

그렇게 부르지 말라고 했는데 또 부른다. 그리고 내 심장은 지금 마구 춤춘다. 나는 여기서 진지하게 의심한다. 혹시 히렌은 나를 심장병으로 죽이기 위해 온 어쌔신이 아닐까? 그거 꽤 신빙성 있는 생각인데?

“다른 생각 하지?”

“앗.”

“곤란해. 그런 말까지 해놓고, 내 앞에서 다른 생각이라니. 그럼 안 되는 거야, 아란.”

히렌의 목소리가 좀 더 달달해진다. 그 이상 달아질 수 있다니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그런데 그 목소리로 내 이름 좀 부르지 마. 일생의 부탁이 될 수도 있으니까. 이제 심장이 내 가슴에서 일탈해서 입으로 나올 것 같아. 그만, 히렌 그만!

“아란.”

“읍.”

“아란, 아란, 아란.”

나를 놀리듯이 히렌이 내 귓가에 내 이름을 부른다. 어떡해. 나 이대로 녹아내리는 건가. 이제는 심장이 뛰고 있는지 멈춰 있는지 모르겠다. 따뜻한 히렌의 숨결이 내 귓속에 파고드는 것 같아. 그렇게 머리가 하얗게 비워졌을 때.

“좋아해.”

으응?

“정말로 좋아해, 아란.”

뭐가? 혹시 내 비녀? 아니면 다른 거? 대체 뭐가 좋다는 거야? 눈은 빙글빙글. 머리는 핑글핑글. 세상이 돌고 도는 느낌. 이미 내 머릿속은 용량 초과다. 더는 일 못하겠다고, 이해라는 작업을 못하겠다며 뇌가 파업을 선언한다. ‘이것은 위험한 단어입니다! 이해하면 돌이킬 수 없습니다!’ 경고가 막 윙윙 돌아간다. 정신없어! 으아!

“네가 날 보면 심장이 뛰듯이.”

히렌이 조금 뒤로 물러난다. 귓가에 숨결이 닿지 않으니 그제야 나는 숨을 쉬었다. 여태까지 숨을 참고 있는 줄도 몰랐어. 그렇게 숨을 몰아쉬는데 더할 나위 없이 예쁘게 웃으며 히렌이 말한다.

“나도 네게 심장이 뛰어.”

엉?

“네게만 뛰는 심장이야, 아란.”

쪽.

“자꾸 도피하지 마.”

쪽.

“너는 이미 내게 잡혔어.”

쪽.

양 볼과 이마에 촉촉하고 부드러운 것이 닿았다. 몸은 빳빳하게 얼고, 머릿속은 이미 모든 일을 파업하고 새하얗게 변한다. 얼굴은 뜨겁게, 뜨겁게 불타올랐다.

그리고 다가오는 얼굴.

“이성으로서, 한 남자로서, 좋아해. 저와 사귀어주세요.”

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