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작품 소개

“나는 악마고, 너의 소원을 들어주러 왔다. 내가 너의 세 가지 소원을 들어줄까 하는데…….”

악마 중의 악마 L, 악마장이 되는 승진시험 과제를 받아든 그는 기세등등하게 과제를 수행하러 인간계로 내려온다. L의 과제는 바로 평범하디평범한 여자, 천나라의 영혼을 접수하는 것! L은 자신만만했지만 천나라 이 여자, 만만하지 않다. 천나라에게 사사건건 무시당하는 L은 악마의 정체성이 산산조각 날 지경에 이르는데…….

L은 과연 천나라를 공략해 승진시험에 합격할 수 있을 것인가?

“그래. 진짜다. 나는 악마고 너의 소원을 들어주러 왔다. 그러니 인간…… 이제 소원을 말하…….”

“하느님, 부처님, 예수님 다 안 되는 거 보면…… 난 지금 환상을 보는 거잖아!”

오 마이 갓! 하며 천나라가 수선을 피웠다.

“드라마 보니까 뇌에 문제 있으면 이렇게 리얼한 환상을 보던데! 뇌에 문제 있으면 돈 드는데!”

2. 작가 소개

신유담

▣ 출간작

고품격 짝사랑

앙마 다이어리

▣ 출간 예정작

고호의 별이 빛나는 밤에

3. 차례

#1장. 악마의 사정

#2장. 악마의 심장

#3장. 악마의 사랑

#4장. 악마의 소원

4. 미리 보기

악마가 나타났을 때 인간들은 대부분 신을 찾는다. 살면서 한 번도 신을 찾지 않았던 자들조차 마음 깊이서부터 우러난 기도를 시작하곤 한다. 신이 방관자라는 것을, 천사들의 놀음에도 악마들의 놀음에도 상관하지 않은 채 그저 인간을 믿기만 하는 존재라는 것을 깨닫기까지 모든 인간이 그랬다.

천나라는 두 가지 면에서 달랐다.

첫째로 신을 찾되 알고 있는 모든 신을 찾았으며, 둘째로 기도가 통하지 않는다는 걸 알았을 때 절망하는 대신 계산기를 두드렸다.

나를 향해 등을 돌린 채 열심히 계산 중인 천나라가 도대체 무얼 하는지 감이 안 잡혀 처음에는 화도 안 났다.

입술을 앙다문 채 절박하게 계산기를 두드리고, 고개를 갸웃거리고, 그러다가 좌절하면서 몸을 뒤로 늘어뜨린 천나라는 침통하게 나를 쳐다보았다.

“왜?”

내 질문에 대답할 마음이 없는 듯 천나라는 고개를 절레절레 젓더니 다시 돌아 뭔가를 갈겨쓰고는 비장하게 일어섰다. 그러쥔 두 손이 너무나 또라이 같아 나는 당황스러웠다. 그리고 나를 싹 무시하고 침대로 가 누웠을 때는 당황스럽다 못해 황당했다.

악마를 만난 인간은 별별 반응을 다 보일 수 있지만 저건 아니다. 계산기도 아니고 침대로 가 이불을 덮고 눕는 것도 아니다.

내가 여기에 있는데.

지금 나 무시당한 건가?

방에 우두커니 서서 잠깐 눈동자만 굴리다가 천나라가 끼적이던 종이를 집어 들었다. A4지 사이즈 위에는 빼곡하게 대출이자와 적금, 펀드, 여윳돈이 계산되어 있었다. 건강검진 비용, 특히 MRI촬영 비용도.

그리고 그 아래에 의지력 넘치게 꼭꼭 눌러쓴 말은…….

[돈 없다! 정신력으로 이겨내자!]

나도 모르게 고개를 돌려 쳐다본 천나라는 눈을 꼭 감은 채 정신력을 총동원 중이었다. 이불을 붙잡은 손 모양이 애처로워 절로 코웃음이 나왔다.

그러니까…… 죽어도 악마는 없다, 이거지? 아픈 거다, 이거지? 그렇지만 병원 갈 돈이 없으니 쌩으로 버티시겠다 이거지?

어디 한번 언제까지 버티나 보자. 인간의 의지력 따위!

……라고 생각했으나 천나라는 정말 오래, 진정성 있게 버텼다.

악마로 태어나 지금까지 별별 인간들을 다 보았고 별별 꼬락서니를 다 겪었지만 천나라는 확실히 기상천외했다.

누군가를 쌩까는 데 있어 프로의식을 발휘하기 쉽지 않은데 천나라는 그 어려운 것을 훌륭히 해내는 중이었다. 안 보이는 척, 안 들리는 척…… 정말 대단했다. 누군가를 투명인간 취급하는 대회가 있다면 얘가 1등이다.

가능하면 혼자 있을 시간을 줄이려고 원래 야근이 많은 회사이기도 하지만 어떻게든 비비기 시작했다. 그 지독한 전 차장마저도 움찔할 정도로 일하고 일하고 또 일하고…… 어쩔 수 없이 일찍 끝나는 날에는 없는 친구 끌어 모아 놀았다. 자기 돈 쓰며 - MRI비용보다는 저렴하다고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은 적 있다. - 놀다 보니 인간관계 좋아지고, 회사 일 자기가 다 끌어다 하니 동료들과의 관계 돈독해지고, 일로 인정받고……. 날 만나고 나서 천나라는 점점 개선되기 시작했다.

그뿐인가? 혼자 집에 있기 싫어서인지 아니면 다른 인간 눈엔 내가 안 보인다는 걸 확인하고 싶어서인지 선반, 변기, 욕조 등도 고치고 청소 도우미도 부르고…… 그러다 보니 급기야 집이 번듯해지는 사태까지 이르는 거다.

심지어 집안에 있던 귀신도 쫓아냈다. 목적이야 나를 쫓아내는 거였을 텐데 나는 그런 부적 따위에 꿈쩍도 안 하고, 애꿎게 얌전히 집에 살고 있던 귀신 두 마리가 노숙귀가 되고 만 거다. 가여운 것들.

그리하여 매일 맥주 홀짝거리는 거 외에는 무미건조하게 살던 인간이 사람같이 살게 되었다. 내가 인간에게 좋은 영향을 미치다니, 뿌듯……하기는 뭐가?! 우와, 미치겠네!

단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았던 문제였다. 못 본 척, 못 들은 척하는 애를 만나다니. 보통 문제가 생긴다면 너무 놀란 나머지 인간이 심장마비로 죽어버린다 정도였는데. 어떻게 하면 이런 발상을 할 수 있는 걸까? 악마를 무시한다니? 무시하다가 진보하다니?

얼마나 뚝심 있게 날 무시했냐 하면…… 내가 의심했을 정도다. 얘가 내가 안 보이는 게 아닐까, 하고.

“야…….”

TV를 보고 앉아 있는 천나라 옆에 슬쩍 앉으며 불러보았지만, 그녀는 미동도 안 했다. 늘 하루 두세 캔은 까먹는 맥주를 홀짝이며 재미없는 TV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다. 동물 귀가 붙어 있는 무릎이 늘어난 추리닝을 입고, 아무렇게나 올려 묶은 머리카락 몇 가닥이 흘러내려 목덜미께에 붙어 있는 것이 간지러운지 계속 긁어대면서…….

키 크고 잘생기고 섹시한 남자 악마가 옆에 있다고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프리한 모습이다. 내가 이렇게 사람 편하게 만드는 스타일이 아닌데.

“내가 안 보이는 건 아니지?”

소파 앞의 테이블로 기어 올라가 시야를 다 가린 채 눈앞에다 손가락을 흔들었다. 무섭게도 천나라의 눈동자는 미동도 안 했다. 마치 나를 뚫고 내 뒤의 TV를 계속 보는 것처럼 꼼짝도 하지 않는거다. 심지어 TV에서 웃음소리가 나면 웃기까지 한다. 이게 연기라면…… 진짜 대단한 건데.

“내가 자존감이 떨어져서 그래. 응? 말해봐. 내가 보이긴 하지?”

왜 이런 걸 애원해야 하는지는 알다가도 모를 노릇. 하지만 나도 모르게 애원하고 있었다.

“소원 들어준다고 안 할게. 보이는지만 확인하고 싶은 거야. 응? 내가 보이면 눈을 깜빡여봐.”

천나라는 반응하지 않았지만, 갑자기 눈을 부릅떠 힘을 줬다. 절대로 눈을 깜빡이지 않겠다는 건데…… 독한 인간.

그러니까 내가 보이는 게 맞긴 맞나 보다. 그렇지. 안 보이려고 할 때도 본 인간이 지금 못 볼 리가 없지.

와…….

내가 옆으로 비키자 반사적으로 쫓아오려는 눈동자를 단속하려 눈물까지 맺힌 천나라를 보며 혀를 끌끌 찰 때다.

띵동.

내가 나타나기 전까지는 한 달 내내 방문자 하나 없던 이 집에 또 누군가 찾아왔다.

선반도 달았고, 변기도 고쳤고, 대청소도 한번 했고, 거실에 내놓은 욕조 누수되는지도 체크했고, 싱크대 문짝 떨어졌던 것도 드디어 고정했는데 또 누가 왔을까?

“‘무엇이든 해드립니다’에서 왔습니다!”

천나라가 도도도 달려 나갔다. 소파 등받이로 기어오르며 누가 왔나 확인하려다 그대로 소파에서 떨어질 뻔했다. 회색 선이 들어간 핑크색 작업복을 입고 우스꽝스러운 핑크색 모자를 벗으며 큰 목소리로 인사한 남자는…… R이잖아?

이 미친놈이?

‘무엇이든 해드립니다’는 또 뭐야?

“이민호입니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뻔뻔하게도 잘생긴 한류스타 이름을 댄 R이 싱긋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