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작품 소개

그를 보호해야 했다.

그의 보호를 받아야만 했다.

그 어떤 관계도 아니었지만

그랬기에 더더욱 함께 있고 싶었다.

피가 섞이지 않은 누이의 아이, 노루를 맡게 된 이리. 10년이란 시간이 흐른 후 두 사람 사이의 감정이 조금씩 변화하기 시작하지만, 현재의 안락함을 깨고 싶지 않았기에 외면하려 했다. 결국 노루는 독일행을 결심하는데…….

사람들의 시선은 변치 않을 터였다. 남들이 보기에 그는 조카를 아끼는 삼촌이었고, 두 사람의 관계도, 그의 마음도 거기서 그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래도 노루가 비에 젖지 않으면 그걸로 됐다. 우산을 가지고 온 학부모들 사이에서 자신을 발견하고 손을 흔들던 아이의 환한 얼굴을 보았을 때 느낀 감정은 순수한 기쁨이었다고, 지금도 맹세할 수 있다. ……해서 노루에게 무엇도 기대하지 않고, 어떤 부담도 주지 않으려 했는데.

「외삼촌은 나랑 지내는 거 안 불편해요?」

「남들과 달라서 힘들었던 적 있어요?」

그 아이의 입에서 왜 새삼 그런 말이 나오게 된 걸까.

2. 작가 소개

목화솜

소년의 사랑을 전파하기 위해 펜을 들었습니다.

BL 백 권 쓰고 싶습니다.

▣ 출간작

외로움의 온도(전2권)

3. 차례

#06. 죄책감의 정체는 

#07. 유리어항 바깥의 세계 

#08. 그대를 위한 선물 

#09. 전야(前夜) 

#10. 그럴수록 너를 생각해 

#11. 기다림 끝에는

#12. 폭로

#13. 고백, 첫 번째

#14. 차가운 기억

#15. 같은 마음, 다른 생각

#16. 사랑해서 미안한

#17. 폴

#18. 결백의 증명

#19. 말없는 이별

#20. 바랐던 것은 오직

#21. 외로움의 온도 

#22. You've really got a hold on me 

4. 미리 보기

월(月)은 그 이름처럼 아름다운 소녀였다.

일곱 살 난 소년의 눈에 열여섯 살짜리 소녀는 까마득한 어른으로 비칠 뿐이었다. 이제껏 ‘가족’이란 존재를 가져본 적 없는 이리에게는 더욱 그러했다. 달빛처럼 교교하면서도 서늘한 눈매를 가진 소녀는, 첫 대면에서도 그 눈으로 이리를 흘긋 보기만 했다. 

「이 아이는 월이란다. 이제부터 누나라고 부르렴.」

월에게서 나긋나긋하고 우아한 부분만을 골라낸 듯한 ‘어머니’가 그렇게 말했을 때, 이리는 소녀의 눈에 차디찬 것이 어리는 것을 보았다.

그날 밤 월은 부모와 격렬한 언쟁을 벌였다. 어렸지만 이리는 그 언쟁의 씨앗이 자신이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처음으로 누워본 침대에서, 잠을 이루지 못하고 이리는 바깥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월은 자신의 새로운 동생을 ‘저것’이라고 불렀다. 그때까지는 누구도 소년이 듣는 앞에서 그런 말을 한 적이 없었다.

그러나 이리는 크게 충격을 받지도, 울음을 터뜨리지도 않았다. 면전에서 그런 말을 듣지는 않았어도 짐작 취급을 당하는 데는 익숙해져 있는 까닭이었다. 고아원에서 벗어났다고 해서 그런 취급도 끝이라고 믿을 만큼 이리는 순진하지 않았다.

그래도 양부모님은 새로 들인 아이를 키우고 가르치는 데 최선을 다했다. 이리는 그들이 자신에게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 학교에서도 집에서도 문제를 일으키지 않고 반듯하게 행동하면 그들도 자신을 친절히 대해줄 것이었다. 게다가 자신에게는 재능이 있었다. 미술과 수학 과목에서 특출난 재능을 보이는 양자에게 양부모님은 가능한 한 최대한의 지원을 해주었다. 그러면 자신은 그들의 지원하에서 그 기대를 충족시켜준다는 암묵적인 거래가 지속되는 한, 소년은 물질적으로도 정서적으로도 안정된 생활을 누릴 수 있었다. 이제 불협화음을 내는 것은 고스란히 월의 몫이 되었다.

아무도 없는 데서 이리가 처음으로 ‘누나’라고 불렀을 때 월은 소년의 뺨을 사정없이 후려쳤다. 완전히 돌아간 얼굴에 대고 그녀가 명령했다.

「다시 불러봐.」

「……누나.」

그녀는 소년의 반대쪽 뺨을, 아까보다 더 세게 후려쳤다. 어여쁜 목소리에는 분노조차 어려 있지 않았다.

「다시.」

「…….」

이리는 입술을 꼭 깨물었다. 입안이 찢어져 뺨 안쪽에 시큼한 피가 고였다. 이윽고 월이 흡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네가 취해야 될 태도야.」

「…….」

「나한테 다시는 말 걸지 마. 알겠어?」

그 후로 남매간에 대화는 시도되지 않았다. 어쩌다 양부모님 앞에서 이리가 그녀를 ‘누나’라고만 칭해도 월은 질색을 했고, 이를 감추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그녀가 이리에게 먼저 말을 걸어온 것은 그녀의 일생에 걸쳐 딱 두 번이었다. 두 번째는 양부모님의 장례식장에서, 네가 이 집에 재앙을 가져온 것이라는 저주와도 같은 말이었고, 첫 번째는,

「이 쓰레기들은 다 뭐야.」

결혼 전, 부모님 집에 있는 제 짐을 월이 가지러 왔을 때의 일이었다. 그녀가 어렸을 적 아버지의 서재였던 방은 이리의 공부방이 된 지 오래였지만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집을 나간 그녀가 이를 알 리 없었다. 방을 뒤지던 그녀는 이리의 미술책과 그림들을 발견했다. 불현듯 어떤 의심이 그녀를 뒤흔들었다. 월은 생각이나 말을 눌러 참는 성격이 아니었다. 그 상대가 이리라면 더욱 그러했다.

그녀는 발견한 것들을 막 학교에서 돌아온 의붓동생 앞에 집어 던졌다. 어린아이와 소년, 성인 남성의 나신을 그린 그림들이 팔랑팔랑 떨어져 내렸다. 그녀가 물었다.

「이 쓰레기들은 다 뭐야.」

데생에 반드시 수반되는 누드화들이라고 말할 수도 있었으리라. 실제로 그 그림들의 목적은 데생 연습이었으니까. 월도 아마 속으로는 반신반의했을 것이다. 그러나, 자신을 이 가정에서 몰아낸 ‘저것’을 비난하기 위해서라면 그녀는 없는 죄도 뒤집어씌울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녀에게 맞았던 뺨의 아픔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던 이리는 이에 걸려들었다. 자신이 아름답다 여겼던 동성(同性)의 몸을 그린 그림 앞에서, 이리는 시선을 피했다. 억눌러온 죄의식을 내비칠 필요조차 없었다. 월에게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그런 건 유전이 아닌가 보네.」

월이 말하며 그의 스케치를 한 장 들어 반으로 쭉 찢었다. 찌이익. 귀를 찢는 듯한 소리가 났다.

이리는 무력하게 자신의 작품이 망가지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녀가 야유하듯 말했다.

「너네 친아빠가 그랬다면, 넌 태어나지도 못했을 테니까.」

또 다른 그림을 집어 든 그녀가, 그림에 그려진 청년과 이리를 번갈아 보았다.

「우리 부모님 돈으로 먹고 자고 배운 주제에, 머릿속에 든 건 이딴 것뿐이라는 말이지.」 

「……그만하세요.」

「우리 엄마 아빠도 알아?」

「…….」

「이제 보니 거지새끼가 아니고 남창 새끼였잖아.」

그녀에게는 어떤 해명도 불가능했다. 월은 그 자리에 선 채 이리의 그림을, 소년이 은폐해온 세계를 모조리 드러내어 파괴했다. 그동안 쏟아지는 폭언들을 이리는 고스란히 견디어냈다. 나중에는 그녀도 지쳐서 물러났을 정도였다.

그럼에도 이리는 월을 마음 깊이 원망할 수는 없었다. 그녀가 자신을 방해꾼으로 여기는 것은, 적어도 월의 세계에서는 온당한 일이었다. 자신이 이제 와서 양부모의 지원과 애정을 포기하기 싫은 것만큼이나 그녀도 그러했을 터였다. 더구나 그녀는 부모님의 친딸로서 모든 것을 누릴 권리가 있지 않았나. 자신이 이 집에 오고서부터 모든 것이 어그러졌음을 이리는 이미 알고 있었다. 그녀에게서 가족을 빼앗았다는 죄책감은, 자신이 동성을 사랑한다는 죄책감보다 도리어 깊은 것이었다. 이성보다는 동성에게 더욱 끌린다는 것은 저 혼자 평생 숨기고 살면 되는 사실이었다. 그러나 월과 부모님 사이의 유대는 이미 깨졌고, 그것을 되돌려놓을 힘은 그에게 없었다.

그녀가 이리의 정체를 양부모님에게 폭로했는지, 아니면 언젠가 그를 협박하고 겁주기 위해 그 사실을 일부러 감추었는지, 그는 알 도리가 없었다. 적어도 양부모님은 그걸 알고 있다는 티를 내지 않았다. 어쩌면 아직 열네 살밖에 되지 않은 소년의 성향을 속단하지 말자는 묵시적인 결정이 있었는지도 모른다. 나중에 이리의 주변인들 몇몇에게 그 사실이 알려졌을 때 이미 양부모님은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그러나 이리는 월에게 사실을 발각 당했을 때만큼 마음을 졸이지는 않았다.

그제야 그는 자신이 그녀를 두려워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때문에 그녀가 두 번째로 자신에게 말을 걸어 ‘다시는 보지 말자’고 했을 때, 마음 깊숙한 데서 우러난 것은 다름 아닌 안도감이었다.

월의 부고를 듣고 몇 년 후, 프리다라는 여자가 웬 어린아이의 손을 붙들고 그를 찾아왔다. 월이 낳았다는 아이는 15년 전 처음으로 ‘가족’을 갖게 된 소년, 그 옛날의 은이리 자신과 똑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귀여운 아이였지만 월과는 별로 닮지 않았다.

프리다가 월의 남편, 폴의 여동생이라면 월과 이리가 친남매가 아니라는 것쯤은 알 텐데 어째서 아이를 여기까지 데려왔을까. 의아하게 바라보니 그녀는 밑도 끝도 없이 생소한 이름들을 늘어놓는 것이었다.

「폴이 재혼을 하게 돼서, 이 아이를 맡아줄 사람이 필요해요.」

「그럼 그 재혼 상대와 아이 아버지, 폴이라고 했나요? 그 사람이 키우면 되질 않습니까.」

「메구미가요? 그럴 여자가 아니에요. 거기다 그 여잔 이미 딸이 있거든요. 아, 딸이었던가? ……아마 그럴 거예요.」

이리는 겁먹은 듯 눈만 깜빡이는 아이를 내려다보았다. 월의 머리칼과 눈동자는 달빛에 대비된 밤하늘만큼이나 까맸는데, 아이는 가느다란 머리칼도 커다란 눈망울도 전부 엷은 갈색이었다.

그가 목소리를 낮추었다.

「하지만 나는 월의 친동생이 아닙니다.」

「알고 있어요. 그런데 당신이 모르는 것도 있어요.」

프리다가 그에게로 몸을 바짝 기울였다. 초록색 눈동자가 의미심장하게 반짝였다.

「저 아이는 폴의 아이가 아니에요. 월과 다른 남자의 사이에서 생긴 아이죠. 아버지가 누군지는 아무도 몰라요.」

이리는 말문이 막혔다. 어지간해서는 놀라지 않는 그도 그 폭로에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프리다는 그런 반응을 예상했던 모양이었다. 자신의 오빠를 속이고 다른 남자의 아이를 낳은 올케에 대해 말하면서도 별로 화가 난 것 같지 않았으니, 희한한 여자였다.

「폴도 물론 그 사실을 알아요. 저 아이는 모르고요. 메구미도 아는지는 모르겠지만, 알게 된다면 폴의 피가 섞이지도 않은 전처의 아이를 키우고 싶진 않겠죠.」

「그 메구미라는 여자는, 어떤…….」

「월과 굉장히 닮았어요.」

프리다가 웃었다.

「어쨌든 당신이 받아주지 않으면, 폴은 저 아이를 시설에 넣을 생각이래요.」

어떤 시설인지 물을 필요도 없었다. 폴이라는 남자 본인이 이리에게 직접 부탁을 하는 것도 아니고, 제 여동생을 시켜서 아이를 한국까지 보낼 정도라면 아이를 기를 의사가 전혀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그 남자는 이리를 낳은 친부모가 그러했듯 아이를 고아원이 맡기려는 것이다.

이리는 다시 한 번 아이를 돌아보았다. 이쪽을 흘끔거리던 아이가 얼른 시선을 떨어뜨렸다. 오늘 처음 보는데도 그 조그만 머릿속에 든 생각이 고스란히 읽힐 듯하다.

월의 아이.

누구도 원치 않아 갈 곳이 없어진 아이.

「……이름이 뭐죠?」

프리다가 서툰 한국어 발음으로 말했다.

「노루예요. 노루 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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