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우의 갑작 스런 호출에 잔뜩 긴장했던 향미는 면담을 마치고 회사 대표 비서실로 내려왔다.
그녀의 주된 일터는 펜트하우스였지만 대표를 최측근에서 보필하는 자리인 만큼 출장이나 개인 수행비서까지 다향한 역할을 해야한다고 했다.
향미는 받아들였다. 어차피 그러려고 일을 시작하기도 했고 또 받는 돈도 적지 않다 보니 그 정도는 당연히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무엇보다 더는 알바를 전전하지 않게 되어 좋았다.
한가지 일에만 집중 할수 있는 환경이 그녀를 조금은 안정되게 만들었다.
다만 한가지 불편한 사실은 그가 자신에게 남자친구가 있다고 철썩같이 믿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만으로는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데 근무 하는 환경이 그렇다 보니 혹여 남자친구와 불화가 있진 않을까 싶어 염려하는 그 모습이 싫었다.
괜한 걱정인데.
그에게 쓸데없는 걱정거리만 안겨다 준듯해서 신경이 쓰였다.
"아니라고 말하면 믿을까?"
마주친 장면이 너무 강렬해서 되레 변명으로 들리진 않을까 그것도 너무 신경이 쓰였다.
가만히 생각을 거듭하던 향미는 고개를 들어 청명한 하늘을 바라 보았다.
이대로 그냥 오해하게 두자니 찝찝하고 수습하자니 뭔가 더 엉켜버릴것만 같았다.
생각해보면 이미 우리는 오래전에 풀수도 없을만큼 뒤엉켜 버렸는데. 이제와서 이깟 오해가 뭐가 대수냐 싶기도 하고.
이 오해를 풀면 지난 과거의 비사까지 다 풀고 싶어질것만 같기도 했다.
흘러간 지난 5년, 많이 힘들었을텐데.
그녀가 가장 불행했던 시간만큼 그의 시간도 평탄하지는 않았을거라 생각하니 마음이 무언가에 쿡쿡 찔린듯 아파왔다.
설명하자면 얘기해야 할게 너무 많았고 이미 굳어져 남아버렸을지 모를 그의 상처를 후벼파는 일이 될지도 모르기에 생각이 많아졌다.
마주치지 않고 살아갔으면 모르겠지만 다시 만난 지금 더이상은 그에게 거짓을 만들고 싶지 않았다.
상처도 주고 싶지 않았다.
다시는 그를 떠나고 싶지 않았다.
이래서 그를떠났었다. 눈앞에 있으면 자꾸 그가 욕심이 나버리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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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은 우선 눈앞에 당면한 오해부터 풀자는 생각으로 굳혔다.
이 마음이 식기전에 사무실로 들어섰다. 다다다쏟아 낼지라도 빨리 해치워 버려야 겠다는 마음이다.
여러가지 고민이 있었고 여러가지 생각이 있었지만 계속 그를 봐야하는 만큼 남자친구 문제 만큼은 풀고 싶었다.
또 언제 마음이 바뀔지 모르니 내친김에 나아가야 했다.
용기는 자주 찾아오는게 아니었으므로.
비서실을 지나 대표실문을 열고 들어가려는데 안에서 어떤 목소리가 들려왔다.
문이 살짝 열려있던 탓이었다.
향미는 저도 모르게 그 틈새로 시선을 구겨 넣었고 그대로 몸이 굳어지고 말았다.
여자의 모습은 너무 나도 아름다웠고 둘의 모습은 심히 다정해 보였기 때문이다.
"이거 진짜 정말 직접 준비한거야? 너무 예쁘잖아."
다이아몬드 반지였다.
도저히 가격을 가늠할수 없어보이는 다이아 반지.
영롱한 그 자태에 설화가 눈을 반짝이며 반지를 내려다 보았다.
"진짜 예뻐. 올해는 내 생일 안 잊은 거로도 모자라서 이렇게 마음에 드는 선물까지 준비했대? 웬일이야?"
설화가 놀란 눈으로 물어오자 현우는 의기양양하게 그녀를 바라보았다.
사실 속으로는 굉장히 당황했지만 티를 내진 않았다.
다이아 반지는 너무 과한거아니야? 목걸이도 있고 팔찌도 있는데 왜 하필 반지지?
아까까지만 하더라도 예쁜짓을 한 민수가 고마워 눈물이 날 지경이었는데 선물의 정체를 확인하고나니 쓸대없는짓을 한 놈을 처단해버리고 싶었다.
"그동안 너무 못챙겼잖아 그래서 챙겨봤어. 생일 축하한다 한설화."
아... 그 일련의 과정을 모두 지켜본 향미는 급히 발길을 돌려 뒤돌아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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굉장히 뜻밖이라는 표정으로 설화는 현우가 끼워준 반지를 만지작 거리며 환한 웃음을 지었다.
"생일 선물이 너무 마음에 들긴하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선배가 준비한게 아니야. 노력이 가상해서라도 봐줄테니까 이거 누구 작품인지 말해봐."
받을때는 잘 받아 놓고 이 여자가 갑자기 왜 이러나 싶어 현우는 잔뜩 긴장했다.
"과해. 선물이 과했어. 이거 민수가 준비한거 맞지? 혹시 나하네 뭐 잘못한거 있어? 투자금이 더 필요한거야? 돈 나보다 더 만잖아 이제?"
"그냥 주면 받으면 되지 분석을 하고 그래."
"평생 생일을 까먹던 댁이 이런걸 준비했다는게 믿기지가 않아서 그래요 믿기지가 않아서. 그러니 내가 순수한 마음으로 이걸 받겠냐고."
"너는 특별한 여자니까 제발 순순히 그것좀 받아주면 안되겠니?"
아무말없이 그녀가 자신을 바라보자 그는 성가시다는 표정을 지었다.
"내가 준비한게 아니고 민수 맞아. 나는 여전히 네 생일을 까먹고 있었고 너 오기전에 민수가 이걸 주더라. 완전007 작전하는줄 알았다. 이제 만족해?"
"아 역시 그래 민수 향기가 나더라. 내 취향을 너무 잘안다 싶더라."
사건의 전말을 들은 설화가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그래. 그래야 얘기가 되지. 김현우가 이런 선물을 준비할 위인이 아니지.
이 남자는 도무지 자신의 생일을 기억하는 일이없다. 그래도 007작전 노력이 가상해서 대충 넘어가기로 한 그녀였다.
"뭐 그래도 일단 내거임에는 틀림없으니까 기분좋게 받을게. 그래도 이거 하나는 확실히 해두자."
민수는 설화의 마음이 어디로 향해있는지 누구보다 잘알고있다.
그리고 회사를 운용하는데 있어서 그녀의 존재가 얼마나 중요한지도 알고있다.
그래서 민수는 두사람을 이어주고 싶은것이다. 설화는 이럴때마다 자신이 좋아하는 남자가 현우가 아니라 그였으면 어땟을지 상상해봤다.
오늘 생일은 순탄하게 지나가는듯 하더니 결국 다 까발려졌다. 체념한 현우는 밥이나 먹자며 나가길 종용했다.
엘리베이터 앞에선 두사람사이에 잠시 침묵이 흘렀다.
"설화야 근데 그 반지 결국내가 산게 맞아."
"무슨 소리야? 민수가 준비했다면서?"
"그거 법카로 샀다에 내 손모가지 걸수있다."
"손모가지 잘라서 박제해도 돼?"
"끔찍한 말 좀 아무렇지 않게 하지 마. 그거 법카 맞아서 잘릴일은 없겠지만."
"사실을 조작하면되지. 오빠 신체일부를 박제해서 내방에두고 싶어지네."
오싹.
이 여자는 가끔가다 제정신이 아닐때가 많다.
"설화야 내년엔 꼭 내가 준비할게. 살려줬으면 좋겠는데."
야릇한 표정이 그녀의 얼굴에 떠올랐다.
"그래 또 속아줄게. 대신 내년엔 꼭 팔 한쪽 잃을 각오해. 그땐 반드시 자를거니까."
아마 그녀는 전생에 마녀였을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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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대표님. 저 커피가 당겨서 카페에 와 있어요."
향미는 걸려온 현우의 전화를 받았다. 얼굴엔 여전히 생각이 많아보였다.
"밥이요? 오늘 별생각이 없어서요. 커피만 마시고 금방 올라갈거에요."
현우와 통화를 하는 와중에도 그의 목소리가 집중이 되질 않는다.
향미의 머릿속에는 대표실에서 보고 들었던 상황밖에 안떠올랐다.
반지를 곱씹고 싶지 않은데 계속 떠올랐다.
그녀의 네 번째 손가락에 반지를 끼워주던 다정한 손길. 생일 축하한다던 따뜻한 음성.
언젠가 그가 속삭여 주던 음성과 부드러운 손길이 생각나 좀처럼 지워지질 않는다.
먼 과거. 그가 제게 보여주었던 다정했던 모습들.
같은 모습으로 다른 여자를 대하는 그의 모습에 과거 우리의 모습이 투영되었다.
심장이 아프게 뛰었다.
"아뇨. 두분이서 드세요. 손님 오셨다면서요. 제가 거길 어떻게 끼어요."
다른 여자에게 보여주었던 따뜻한 모습에 지금까지 해왔던 결심과 오늘 가졌던 용기는 흔적도 없이 바스라진다.
향미는 느리게 눈을 감았다 떴다. 다 부질없게 느껴지는건 왜 일까.
살아가는것 말고는 아무것도 생각하고싶지 않았는데 그렇게 마음을 먹었는데.
어쩐지 그의 앞에만 서면 살아가는것보다 사랑했었던 기억이 먼저 떠오른다.
"저는 그냥 카페에서 조금만 있다가 갈게요. 생각할것도 조금 있고 해서요. 어차피 대표님 식사도 밖에서 하셔서 집에 음식준비 할 필요없잖아요. 네. 네. 알겠습니다. 좋은 시간 보내세요."
현우의 목소리를 듣고나니 이래저래 마음만 더 복잡해졌다.
"애인이겠지."
만나는 여자가 있을 거라고는 생각을 안해봤다.
생각해보면 왜 그런 생각을 했는지 모를 까닭이다.
그저 막연히 없겠지? 라는 생각이 저변에 있었는지 모르겠다.
입맛이 쓰게 달아올랐다.
"여자친구랑 있으면서 나한테 밥먹었냐고는 왜 물어보는건데 그사람한테 충실해야지."
사소한 일 하나까지 신경 쓰이는 지금...모르겠다. 지금은 잘 모르겠다.
그때였다.
"향미씨 혼자서 웬 청승?"
한실장 민수가 다가오며 밝게 웃었다.
"아 실장님. 오셨어요. 저 그냥 잠시 바람좀 쐴겸해서요. 실장님도 청승 떨러오셨나봐요?"
향미가 해사하게 웃으며 묻자 민수가 능청맞게 대답했다.
"혼자만의 비밀이었는데 동지가 생겼군요. 둘이서 하는건 청승이 아니죠. 앞으로는 월급 루팡으로 바꿔야겠네요. 우리 방금 루팡 창단 멤버 된거 아시나요?"
"앗. 조금 위험하지만 바람직하네요."
장난기섞인 대답에 두사람이 마주보고 웃는다.
그는 특별한 일이 없으면 점심시간에 이곳 카페를 찾는다고 했다.
두 사람은 마주보고 앉아 서로를 바라보았다.
"첫날이라 정신없죠?"
적응도 해야되고 업무 숙지도 해야하고 신경 쓸 것이 많은 와중에 대표놈은, 그녀를 혼자두고 있다.
"대표라는 사람이 참 인정머리가 없어요. 아! 이런? 속마음이 었는데."
실수를 가장한 진담이라며 민수가 크게 웃었다.
"어쨋든 첫날인 향미씨를 혼자두고 대표님이 잘못했네요."
직원은 월급을 루팡하고 대표는 비서를 루팡한다며 둘은 깔깔 거리며 웃었다.
점심시간. 치열하고 열기가득한 공간을 벗어나 맞이하는 잠깐의 여유.
민수가 시종일관 향미를 배려해가며 나누는 대화에 마음이 따뜻해진 그녀가 그에 맞게 화답했다.
"그러니까요. 대표님 완전 나빴어요. 그런데 실장님은 되게 좋으신분 같아요. 위트도 있으시고요 감사해요. 이렇게 신경써주셔서."
"제가 원래 미인한테 좀 약합니다. 그리고 대표님 같이 험담해주셔서 오히려 제가 더 감사한대요?"
민수가 시원하게 웃자 그녀도 그를 따라 크게 웃었다.
가식적인 웃음이 아닌 마음에서 부터 나오는 그런 밝은 에너지.
쏟아지는 햇살아래 마주한 잠깐의 여유가 좋다.
행복이란 그리 거창한게 아닌가보다. 사소하고 소소한것에서 이렇듯 따뜻해 지는걸 보니.
"덕분에 좀 웃네요. 여유란 참 좋은 것 같아요."
향미의 입가에 작은 미소가 걸렸다.
어깨 를 작게 들썩이며 주변의 풍경을 눈에 담았다.
열어둔 창문 틈으로 살랑 불어오는 바람이 향미의 머릿결을 스쳤다.
봄이 시작된지 꽤 된것 같은데 어쩐지 올해들어 처음 느껴보는것 같은 계절이다.
서로를 배려하는 편안한 침묵이 고요히 흐른뒤에야 민수의 입술이 열렸다.
"참 정리는 좀 하셨어요? 갑자기 호출해서 정리도 제대로 못하고 왔죠? 미안해서 어쩌죠."
"아, 짐이요? 급할거 뭐 있나요. 천천히 하면되죠. 그리고 업무를 위한 당연한 호출이었는데 뭐가 죄송하세요. 실장님도 참."
향미가 머리를 쓸어 넘기며 웃었다.
민수는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뭐든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그녀의 모습이 보기 좋은 까닭이다.
문득. 유학시절 어떤 여인과 그녀가 겹쳐보인다.
현우가 진심으로 사랑했다던 여자.
-그녀는 모든일에 긍정적이야.
언젠가 현우가 그녀를 생각하며 제게 해주었던 말들.
-같이 있으면 그냥 웃게 돼.
지금과는 달리 웃음이 맣았던 현우의 그때 그 시절.
-그녀는 밝기도 하지만 맑아. 사람이 따뜻해. 그래서 나도 그런 영향을 많이 받게 되더라. 좋은 남자가 되주고 싶어 정말로.
그러다 어느 순간 끝나버린관계.
그때부터 현우는 웃음을 잃어갔었다.
일부러 사람과의 관계에 선을 긋는건지 아니면 상청받기 싫어서 무의식중에 나오는 방어기제 인지는 모르겠지만 현우는 그녀를 잃고 난후 그 누구도 마음에 담지 못했다.
"그래요. 집이야 천천히 정리하면 되죠. 그런데 문제는 대표님이에요."
"대표님이 왜요?"
"결벽증까지는 아닌데 자신이 머무는 공간이 어지러운걸 못보세요. 아마 향미씨 짐을보면 정리하고 계실지도 모릅니다."
아 맞다. 그랬었지. 그사람 지저분하고 어지러운게 딱 질색...잠깐!
"헐!."
향미는 눈을 번쩍떳다.
아! 아! 속옷 정리하다가 왓었지 참!
침대위에 온갖 속옷이란 속옷은 다 던져놓고 정리중에 호출을 받았다.
향미는 몸을 급히 일으켰다.
"실장님 저 급한일이 생겨서요! 죄송하지만 먼저가보겠습니다!"
"예? 아, 네. 그래요. 어서 가보세요 향미씨."
향미는 번개처럼 번쩍하며 자리에서 사라졌다.
"아! 안돼! 안돼! 안된다고!"
아까 점심먹으러 간다고 헀는데 아직 집에 안왔겠지? 그래 여자친구분 생일인데 이렇게 빨리 집에 올리가 없잖아!
망할! 그래도 안심이 안된다.
향미의 바람과는 달리 현우는 정말 간단히 밥만먹고 이미 집으로 향했다.
대표지만 대표아닌 대표 집돌이의 귀소본능 이었다.